[달라지는 차례·제사 의식] "다들 바쁜데 … 제사 한꺼번에" 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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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62.가명.경기도 의정부시)씨는 2년 전부터 4월과 10월 여섯 형제자매의 가족과 함께 설악산 인근 콘도로 1박2일 가족 나들이를 간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 무렵에 온가족이 모여 제사 대신 추모 가족 모임을 여는 것이다. 제사상은 없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식을 한다. 밤이 늦도록 생전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딸들은 곧잘 눈물을 흘리곤 한다.

다음날은 즐거운 가족 야유회 시간. 꽃구경.단풍구경을 하고 온천욕도 함께한다. 김씨네의 이 같은 추모 모임은 둘째 사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사위는 "다들 바빠 제사에 참석하기 힘든데 아예 제사를 즐거운 가족 모임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딸들이 선뜻 찬성하자 며느리들도 좋아했다. "그게 무슨 제사냐"고 빈정대는 친척도 있지만, 장남인 김씨는 "가족끼리 화합하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제례 문화가 바뀌고 있다. 여전히 차례.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여러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거나 제례 절차를 간소화하는 집이 늘고 있다. 본지의 '차례와 제사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는 응답자의 25%가 여러 제사를 합해 특정일에 모시고 있었다. 8%는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고 있으며, 17%는 부모님만 따로 제사를 모시고 그 윗대 제사는 합쳐 모신다고 답했다. 일종의 '메모리얼 데이'를 만들어 조상을 한꺼번에 기리는 것이다.

김미령(42.여.가명.서울 망우동)씨도 4년 전부터 시아버지 제삿날에 시어머니와 증조부모의 제사도 지낸다. 19년 전부터 한 해 여섯 차례 제사를 모셔왔지만 미용사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진 김씨는 제사를 합쳐 지내자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가족이 제사는 한꺼번에 지내되 상만은 따로 차리자는 절충안을 내 이같이 합동 제사를 모시고 있다.

차례.제사 절차도 갈수록 간소해질 전망이다. 본지 조사에서 차례.제사 음식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응답이 56%(복수 응답)였으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말고 추모만 하자는 응답도 34%에 달했다. 제사는 장남 집에서 지내되 형제자매가 음식을 나눠 준비하거나(31%), 모든 형제자매가 번갈아가면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21%)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박복남(55.여.서울 행당동)씨 집은 이미 차례.제사를 형제 간에 나눠 지내고 있다. 9년 전부터 맏며느리인 박씨는 설날과 시어머니 제사를 챙기고, 추석과 시아버지 제사는 손아래 동서 박가야(59)씨가 모신다.

하지만 아직은 제사를 합치거나 차례.제사를 자손 간에 나눠 지내는 데 거부감을 보이는 집이 더 많다. 주부 이선아(38.서울 대치동)씨는 "제사를 합쳐 지내자고 했다가 시아버지가 '죽는 꼴을 보겠느냐'고 화를 내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매년 열세 차례씩이나 제사와 차례상을 차리고 있다"고 말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13세손이자 탤런트 유시원의 아버지인 유선우(70)씨는 "제사는 가족 화합과 자녀 교육에 매우 중요하다"며 "집안의 며느리 중 불만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가족 구성이 변하면 차례.제사 전통도 바뀔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본지 조사에서 후손들이 제사를 계속 지낼 것이라고 예상한 응답이 46%에 불과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장경자(55.여.서울 삼성동)씨는 이에 대비해 아예 시부모 차례.제사를 모두 성당으로 옮겼다. 딸만 셋인데 결혼 후 딸들이 친정집 제사에 신경 쓰지 않도록 미리 조치한 것이다. 장씨는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차례.제사를 성당으로 옮겼고, 나중에 죽을 때도 제사를 모시지 말라는 유언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딸이 제사를 모시는 집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장인.장모 또는 친정 부모의 제사를 모실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51%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세대별로는 입장 차이가 컸다. 50대 이상에서는 응답자의 34%만이 처가 또는 친정의 제사를 모실 생각이 있다고 답했지만, 20대에서는 이 비율이 73%로 껑충 뛰었다. 30대에서는 57%, 40대에서는 45%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차례와 제사는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질문에 45%가 '아들과 딸 구별 없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응답에서도 세대 차이가 나타났다.

50대 이상에서는 장남 39%, 장남 또는 아들 32%로, 반드시 아들이 모셔야 한다는 응답이 71%에 달했고, 아들.딸 구별 없이 모셔야 한다는 응답은 29%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들.딸 구별 없이 모셔야 한다는 대답은 40대 46%, 30대 48%로 연령이 낮아질수록 많아졌고, 20대에서는 이런 대답이 62%로 크게 늘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가족 구조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제사를 실질적으로 떠맡고 있는 60대 이상 세대가 타계하고 나면 제사문화는 빠른 속도로 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함 교수는 또 "현재와 같이 여성에만 부담을 안기는 제사문화는 고부 갈등이나 동서 갈등 등을 조장해 여성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며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제례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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