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씨앗의 논리(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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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엄살과 마찬가지로 「덤」이라는 말도 썩 좋은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도 한국인의 상거래에서는 빼 놓을수 없는 토착어의 하나이지요. 그렇지요. 내가 어렸을 때에, 최초로 물건을 사면서 배운말도 바로 「덤」이라는 말이었읍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다같은 경험을 했겠지만 그것은 엿을 팔 때였읍니다. 엿장수는 으례 가윗소리를 울리고 마을 골목에 나타납니다. 조금은 청승맞기도 한 가윗소리에 동네아이들은 마을이 돌며 코묻은 돈을 꺼내들고 엿목판으로 달려옵니다. 그런데 그 엿을 사먹는 재미는 엿맛 자체보다도 「덤」을 받는 그 재미요 맛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같습니다.
빈병이든, 넝마든, 또는 10전자리 동전이든 엿장수는 눈대중으로 엿을 끌같은 쇠붙이로 잘라냅니다. 그러나 거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옜다!』하고 엿을 건네주어도 아이는 그냥 제자리에서 있읍니다. 저울로 달아 파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엿장수 맘내키는대로 잘라둔 것이지만 많다 적다 시비를 벌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는 엿장수에게서 엿을 받으면 많고적고간에 『덤 주세요!』하고 말하는 것이지요.
엿장수 아저씨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듯이, 두말 하지않고 엿목관에서 다시 엿을 떼냅니다. 『옜다! 덤받아라!』이렇게 덤을 받고나서야 아이들은 비로소 싱긋이 웃고 입하나 가득히 엿을 쑤셔넣는 것이지요.
덤받는 재미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마을 아이들은 심심했을까? 엿장수아저씨는 망설이는 체하다가도 큰 인심을 쓰듯이 덤을 떼어주는 그 연출력에 의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신나게 해주는 것이었지요.
덤받는 것이 생리화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도 여전히 그 「덤」의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고봉」문화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되나 말은 엄격한 도량형기입니다. 그러나 양을 정확하게 재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도 옛날 한국사람들이 되질을 하고 말질을 하는것을 보면, 으례 고봉으로 담았던 것이지요.
쌀이고 뭐고간에 말에서 흘러내리면 그것을 다시 주워 수북이 올립니다. 몇번이나 그렇게해서 고봉으로 되어 한말두말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저울의 눈금 하나를 가지고 다루는 것이 상인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의 되길 말질은 넉넉한 고봉이 아니면 서로 거래가 되지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덤을 주고 받는 것이 우리의 상거래였던 것입니다.
나는 어른이된 뒤, 「덤」의 심리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읍니다. 한국사회 전체가 무언지 모르게 덤을 주고 받는 비합리성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철도 들기 전에, 한국인은 엿목판가에서 덤 받는 것을 배웠고, 또 그 맛을 즐겼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대체 무슨 덤을 받으려고 할 것인가?
자기의 노력 이상의 것을 받아내려 하는 사회, 그리고 또 실력이나 능력이상의 것을 주는 그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덤을 바라는 자도, 덤을 주는 자도 그것은 사회의 합리성에 불을 지르는 자요. 공정한 질서에 물을 끼얹는 자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이탓이 아니라, 이른바 합리주의사회, 능률위주의 사회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덤은 과연 악습이라고만 할수 있는가? 그 반대명제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돈을 주고 받으면 그것으로 끝내버리는 「거래」, 인간관계가 나날이 이 매정스러운 「거래」로 번져가고 있읍니다.
남녀의 사람도, 친구의 우정도, 이웃과 이웃의 만남도 그것은 저울을 사이에 둔 상가의 거래가 되고 있읍니다.
그 싸늘한 거래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째서 우리 선조들은 사고 파는것 외로 덤을 주고 받는 상거래의 여운을 가지려했는지 짐작이 갈 것같습니다.
말질을 깎아 하지않고 고봉으로 담았던 것은, 물질 위에, 상거래위에 경을 담아 주었던 것이지요. 그 냉엄한 상술 속에도 덤을 통해 정을 나누는 인간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생각하면 그랬던것같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시골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그까짓 티끌만한 그 엿이 탐이 나서 덤을 달라고 했을 것입니까, 아무리 엿장수라해도 엿만 팔고 다닌게 아니라 정을 나누어 주고 다니기도 한것이지요. 아이들은 덤을 통해서 그 정을 확인하고 엿맛처럼 달콤하게 맛보았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거래만으로는 서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덤의 풍속이 생겨난 것이 아니겠읍니까! 덤은 물질의 탐욕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만으로는」살아갈 수 없는 인정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덤」이란 말 옆에는 감정적 여운을 나타내는 말, 「섭섭한 것」「아쉬운 것」「서운한 것」의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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