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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⑨스포츠] 83. 서울52 : 나고야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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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는 순간 정주영 유치위원장(왼쪽)을 비롯한 한국의 유치위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전임 대통령(박정희)이 계획한 사업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패배주의적인 발상이다. 관계부처는 물론 재계와도 긴밀히 협조해 강력하게 추진하라.”

1980년 11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여름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출하도록 주무부서인 문교부의 이규호 장관에게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유치는 하나의 꿈일 뿐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작아 회의적인 분위기가 지배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의 이 말 하나로 서울 올림픽 유치 작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서울올림픽사』(2000년 국민체육진흥공단 발간)에 따르면 올림픽 유치를 처음 생각한 사람은 박종규였다. 대한사격연맹 회장으로 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태릉에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러낸 박종규는 세계사격연맹 부회장에 당선됐고, 79년 2월 대한체육회장이 됐다.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치러내면서 스포츠 외교에 눈을 뜬 그는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 1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했다. 3월엔 문교부에 올림픽 유치 건의안을 내고 유치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10·26 사태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박종규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쇄신법에 묶이면서 올림픽 유치는 물건너 가는 듯했다. 유치 활동이 박종규 개인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일보는 80년 10월 27일자 6면 톱기사로 ‘88년 서울올림픽 유치 어려울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올림픽 유치 계획을 내놓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구체안을 마련하지 못했고, 예산 확보 방안도 감감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올림픽 유치 작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유치 신청 접수 마감일을 한 달가량 앞두고 박종규는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 각하께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는데 불의의 사태로 미뤄지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냈던 박종규는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인사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박종규는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만 올림픽을 통한 각종 수익사업과 해외에 한국을 홍보하는 효과 등을 따지면 오히려 흑자가 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확답을 미룬 채 “잘 알았다”며 돌려보냈다. 이규호 장관도 11월 28일 전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일본이 64년 도쿄올림픽을 치르면서 놀라운 경제성장의 초석을 마련했다”며 “대통령만 결심하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이 장관, 소신을 갖고 있소?”라고 물었고 “기한 내로 유치신청서를 IOC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린 순간이었다.

한국은 이후 스포츠인들과 재벌 총수, 외교관, 상사 주재원들이 전 세계를 뛰어다니면서 IOC 위원들을 설득했다.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 당시 대한체육회장은 사업보다도 올림픽 유치에 모든 열정을 다 쏟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81년 9월 30일.
“서울 52, 나고야 27.”

독일 바덴바덴 총회장에 울려퍼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표에 온 국민은 환호했다. 아시안게임도 치른 경험이 없는 작은 나라 한국이 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낸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소련· 중국은 물론 동유럽 여러 나라와도 국교가 없던 시절이었다. 이념적으로도 동서 진영이 첨예하게 맞서 있었다. 더구나 한국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했다. 적대국 북한의 테러 위협도 충분히 예견됐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일본 나고야를 제친 것이었다. IOC 위원들의 ‘쿠데타’에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77년 8월이었다. 아이치현의 나카타니 지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88올림픽을 나고야에서 개최하고 싶다는 의견을 일찌감치 밝혔다. 한국보다 1년여 먼저 유치전에 뛰어들어 승리를 장담하던 나고야 관계자들의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덴바덴 드라마’를 연출한 한국은 86년 아시안게임으로 예행연습을 치렀고, 힘들 것이란 예상을 깨고 서울올림픽을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80년 모스크바, 84년 LA올림픽이 각각 서방국가와 동유럽의 보이콧으로 반쪽 대회로 치러졌지만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모든 국가가 참여한 통합 올림픽으로 평가받았다. 또 한국은 서울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4위에 올라 스포츠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성백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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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 인터뷰
“한국인 열정이 신화 일궜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한국 정부와 온 국민의 열성에 IOC 위원들의 마음이 움직인 결과다.” 사마란치 (현 명예위원장)전 IOC 위원장은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8월 29일)에서 “한국이 88 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같이 답변했다.

-1981년 바덴바덴 총회에서 서울이 나고야를 제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이 결정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은 당시 상당수 IOC 회원국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도 감점 요인이었다. 더구나 나고야는 서울보다 먼저 유치활동에 들어갔고, 일본은 64년 도쿄올림픽을 치른 경험도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서울이 유치권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국민의 열화 같은 지지 때문이었다. 나고야는 시 혼자서 뛰었지만 서울은 한국 정부와 온 국민이 진정으로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기를 간절하게 염원했다. 이런 점이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나는 IOC가 서울을 선택한 것을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올림픽에 대한 평가를 해 달라.

“나에게 서울올림픽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또 정치적인 면이나 경제ㆍ사회ㆍ스포츠 등 다방면에서 한국에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 이후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으며, 이제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은 2014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해 또 한번의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조언을 해 달라.

“평창은 2003년 IOC 총회에서 아쉽게도 3표 차로 밴쿠버에 2010년 올림픽 개최권을 줘야 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난번과 같은 유치 노력을 한다면, 한국 국민의 지지와 성원이 뒷받침된다면 2014년 개최지 경쟁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때 중앙일보
서울올림픽 유치 확정

독일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88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는 1981년 10월 1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북괴 방해속 예상 뒤엎어’라는 부제가 당시 첨예했던 남북 간 갈등을 말해준다. 전두환 정부는 이날 올림픽조직위원회를 체육인ㆍ경제인ㆍ문화인 및 정부 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적 기구로 구성한다고 발빠르게 발표했다.

“그땐 회장할 맛 났지”
김종하(전 대한체육회장)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뒤로는 경기단체장을 하는 맛이 났습니다. ”

김종하(71) 전 대한체육회장 겸 전 핸드볼협회장의 회고다. 청와대의 지원과 성화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1년 앞둔 85년 가을, 전두환 대통령은 각 경기단체장들을 청와대로 불러모았다.

“앞으로 아시안게임이 1년, 88서울올림픽이 3년밖에 안 남았다. 여러분이 회장을 맡고 있는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고 못 따고는 여러분 하기에 달렸다. 알아서 해라.”

각 단체장은 청와대 모임 이후 자신이 맡은 경기단체 간부들을 체육회 사무실로 불러모았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지원하고, 경기장이 부족하면 더 지어주겠다. 총력 준비로 반드시 금메달을 따자”고 독려했다. 청와대는 수시로 경기단체장들의 어려움을 청취했다. 대부분이 기업의 오너인 단체장들은 불합리한 갖가지 규제의 완화 등 사업상 애로사항을 전달했다. 통로는 체육부나 대한체육회였다고 한다.

기업 총수들이 경기단체를 맡게 된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정부의 예산 지원이라야 보잘것없었던 탓에 지명도가 있는 회장이라야 모금활동 등을 통해 자금 조달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이후에는 거의 모든 종목을 기업인들이 맡았다.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가능하면 기업인들이 하도록 해라.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도 그렇고, 기업의 앞선 경영기법을 스포츠 단체에 도입해야 우리 스포츠도 선진화한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건희 삼성회장이 레슬링협회장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양궁, 김상하 삼양사 회장이 농구를 맡았다.

당시 고합상사 회장이면서 핸드볼협회장을 맡은 김종하 회장은 “청와대에서 각 경기단체장 회의를 하면 마치 전경련 회장단 모임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이후 기업인들은 대부분 경기단체를 떠났다. 금메달을 따든 노메달이든 간섭할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정치인이나 경기인 출신들이 메우고 있다. 당연히 자금 조달 등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요즘 체육인들은 5공 시절에 대한 향수가 절절하다.

신동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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