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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제79화 육사졸업생들(8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기가 임관돼 나가고 7기가 교육중일 때인 48년8월 나는 중령으로 통위부 작전교육국장을 맡고 있다가 미국 보병학교에 유학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군영출신 6명이 함께 가게 됐는데, 선임은 이형근대령이었고 나머지는 중령급들로서 민기식·이한림·임선하·김동영,그리고 나였다.
이 유학은 미군당국이 자기네 비용으로 보낸 것이었다. 우리 국군을 미국식으로 꾸며 나가기 위해 미국식 체제를 도입해 오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8월11일 떠날 예정이었으나 기상관계로 13일에 떠났다. 그래서 막상 우리나라의 정부수립과 독립선포를 미국 땅에서 맞아야했다.
출항지는 여의도 공항이었다. NWA가 우리나라에 취항한지 얼마 안돼서였다. 그때 기종은 C-45 종류인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 보병학교는 조지아주의 아틀랜타시 근교 포트 베닝기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초등군사반·고등군사반·낙하산 교육대 등이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고등군사반에 들어갔다. 우리반에는 중국·영국·터키의 장교들도 들어 있었다.
영어를 좀 안다고 해서 선발된 모양인데, 실제로 영어가 몸에 밴 것이 아니어서 현지에서 고생이 많았다. 미국인 교수·교관들은 CP(지휘본부)등 약어를 많이 섞어 써서 더욱 어려웠다.
하오 첫시간에는 조는 학생이 많아 교수들이 조크나 슬램을 많이 써서 학생들을 웃기고 재미있게 하려고 애썻다. 영미계 학생들이 모두 그것을 알아듣고 웃어댈 때도 우리는 멍하니 앉아 있어야했다.
상오 10시에 학과가 시작돼 하오 5시에 끝났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이었다.
학교의 여기저기엔 코카콜라 회사에서 설치해 놓은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독도법과 전술학은 야외에 나가서 했는데 그때마다 코카콜라차가 야외교정까지 따라나왔다. 학생들은 1병에 5센트짜리 콜라를 많이 사마셨다.
우리는 1년코스의 장기과정 비용으로 1인당 1천8백달러를 받아 쪼개 쓰고 있었는데 많이 모자랐다. 그래서 본국에다 이 사정을 호소하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대표 집필자는 항상 이형근대령이었다. 그러나 돈은 더보내오지 않았다.
우리가 졸업한 것은 49년6월이었다. 귀국할 때는 일행이 4명으로 줄었다. 이형근대령은 교 육도중 준장으로 진급되면서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발령받아 워싱턴으로 갔고, 미국태생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학병으로 나갔던 김동영중령은 그대로 미국에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김중령이 귀국치 않자 당시 총참모장이던 채병덕씨가 노발대발하여 미국대사관을 통해 소환하겠다고 말했는데 그는 계속 돌아오지 앉았다. 한때 미국방성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금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형근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하자 학교 당국에선 즉시 장군용 세단차를 내주었다.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주재 무관이요, 초대 주미무관이 되어 49년2윌 워싱턴에 부임할 때 내가 부관격으로 모시고 갔다.
이장군은 무관으로 있는 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부임해 보니 활동비가 한푼 안나와 있고 봉급도 보내오지 않았다.
이장군은 당시 주미대사인 장면박사와 같은 호텔의 옆방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비용을 댈 수가 없어 청구서를 모두 장대사에게 얹어버렸다.
봉급이 안나오기는 장대사도 마찬가지였다. 장대사는 미국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대사관을 운영해 나가는 형편이었다.
이장군이 장대사 보기가 민망해 변두리의 값싼 하숙집으로 옮기겠다고 했더니 장박사는 『이장군, 국가체면이 있지 앉소. 너무 걱정말고 계속 견뎌봅시다』고 했다.
이장군은 견디다 못해 귀국하겠다고 했더니 장대사는 『빨리 군원을 따서보내야 하는데 귀국이라니. 안될 소리요. 같이 참고 뛰어봅시다』하는 것이었다.
이장군은 그후 본인의 표현대로라면「문턱이 닳도록」미국방성을 드나들면서 군원교섭을 벌였다. 탱크를 달라는 것이었다. 미군들은 한국지형엔 탱크가 필요없고 북괴군의 실력이 형편 없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버텼다. 이들과 싸우고 졸라서 이장군은 M-8 장갑차 27대를 얻어냈다.
李장군이 넉달동안 무관으로 있으면서 장면대사에게 진 빚이 6천달러나 됐다. 49년6월 이장군이 귀국하여 이범석장관 (국무총리겸직)에게 귀국신고하면서 빚얘기를 했더니 『달러는 이박사가 쥐고 있으니 그분께 말씀드리라』는 것이었다.
이장군이 이승만대통령에게 말했더니 『장군이 빚을 지다니 그게 웬말인가』하면서 친필로「당지」라고 표시해서 메모를 써주었다. 이장군이 『이게 무슨 뜻입니까』했더니 『당장지불하란 말일세』하더라는 것이었다.
이장군은 이 돈을 즉시 장대사애게 보내 빚을 갚았다. 그후 장대사를 만났더니 『내게 미국서 돈 빌어가고 갚은 사람은 이장군이 처음이고 유일한 분이요』했다고 이장군은 말하곤 했다.
교육을 마친 우리 일행중 4명은 샌프란시스코로 와 거기서 배를 탔다.
미 해군 수송선이었다. 그 배엔 한국으로 부임하는 고문관 요원들과 그 가족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인천을 거쳐 귀국해 보니 독립후의 우리나라는 소란이 극도에 이르고 있었다. 여순반란이 있었고, 지리산과 태백산의 공비토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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