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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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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곰이 주식시장에서 나쁜 동물의 대명사가 된 건 18세기 초, 전적으로 인간 때문이다. 1701년 미 보스턴에는 곰 가죽 시장이 열렸는데 장사가 잘됐다. 가끔 물건이 동나 가죽 값이 오르면 영악한 상인들은 며칠 뒤에 주겠다며 없는 곰 가죽을 미리 팔았다. 가죽 값이 비싸지면 곰 사냥꾼들은 더 열심히 사냥하게 마련이어서 곧 가격은 다시 떨어졌다. 상인들은 비싼 값에 미리 판 곰 가죽을 쌀 때 사서 고객에게 전달해 이득을 봤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곰 가죽(bear skin)'은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보는 투기꾼'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고, 나중엔 가죽(skin)을 뺀 '곰' 혼자서 죄없이 주가 하락의 책임을 짊어지게 됐다. 문헌상에는 1719년에 출판된 디포의 '증시의 해부'에서 '곰 가죽 매수자'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반면 황소의 등장은 좀 늦었다. 1850년께 월스트리트의 한 신문이 곰에 맞설 동물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내세운 게 황소(bull)다. 치솟은 뿔이 강한 상승장의 상징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에드워드 챈슬러는 '금융투기의 역사'에서 'bull'은 '강세'를 뜻하는 독일어 bullen에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황소는 곰과 달리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선 태양신의 자손이라며 신성한 소 '아피스'를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파피루스 아피스'에는 황소를 미라로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을 정도다. 이집트의 황소 숭배는 고대 히브리인에게 전해져 성서에도 기록된다. 모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론이 신(神)으로 섬긴 황금 황소 상이 그것이다. 프레더릭 시문스는 '육식 터부의 문화사'에서 황소가 "힘의 상징이자 초자연적인 이미지를 갖췄기 때문에 숭배 대상이 됐다"고 했다.

요즘 한국 증시는 황소 천지다. 10년10개월 만에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돌파하자 투자를 부추기는 장밋빛 전망만 가득하다. 곰은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 "황소가 뿔을 곧추세우면 곰은 꼬리를 감춘다"는 증시 속언 그대로다. 이러다 주가가 내리기라도 하면 애꿎은 곰만 또 잔뜩 원망을 들을 터지만, 어쩌랴. 말 못하는 축생으로 태어난 죄(罪)를 탓할밖에.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