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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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며칠 사이에 글로 옮기기조차 섬뜩한 가정파탄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세인에게 충격을 주고있다.
그 사건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와 문제를 갖고 있고 그 발생양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한가정의 파탄과 생명무시의 정신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일치하고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형태적으로는 두세 가지 유형으로 모아 볼 수가 있다.
어느 가정에선 가장이 자녀들을 가둔 채 불을 지르든가 살해했고, 한 가정은 의처증의 가장이 부인을 살해했으며 다른 한 가정에선 가정주부가 전처 소생의 아들을 남을 시켜 결국 목숨을 잃게 했다.
어느 의미에서 그 같은 불행한 사건들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리인 이웃들의 절망과 좌절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도 있다.
왜 우리의 이웃들이 그 같은 삶의 부정이랄 극단적인 행동을 취해야했으며 그 것이 왜 일반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 반성은 직접적으로는 가족의 불화, 가정의 이탈에서 찾아진다.
불행의 주인공들은 거의 가정불화로 고민하고 부부싸움에 지쳐있음을 볼 수 있다.
문제의 어느 가장은 고부간의 마찰로, 또 다른 두 가장은 각각 부부싸움이 발단이다. 물론 싸움의 원인들은 각기 다르겠으나 서로가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가족의 입장은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한 경우는 아예 가정의 안주인인 부인이 빈번히 가정을 비우거나 가출하고 있다.
이것은 가족구성원 사이의 상호불신과 미움이 원인이겠으나, 그 근본원인은 가족구성원들이 각기 자기의 본분을 잊고 자기의 분임과 의무를 망각한 때문에 생긴 불행이다.
부부가 가정을 지키며 꾸려가야 할 사명에 투철하고 자녀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통감한다면 가정파괴의 극단적 선택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느 의미에서 가정의 파탄은 현대의 핵가족제도가 남은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그나마 삶의 보루가 되고 위안의 근거가 될 가정이 불화 때문에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는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가정의 파탄에서 흔히 어른의 독선적 폭력과 어린이의 희생이 두드러지고 있음도 주의해야겠다.
부모들은 물론 자신의 좌절과 절망에서 혹은 일시적 격분과 증오의 폭발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범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들은 가정을 포함한 모든 것의 부정이라는 극단적인 정신상황 속에서 자기의 자녀들마저 살해하고있는 것이다. 일면엔 자기들이 없을 때 겪게될 자녀들의 불행을 걱정한 최후의 애정의 표시가 그 같은 비뚤어진 잔혹행위로 표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비리성적인 어른의 독선이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남아 기르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되 자녀를 희생시키고 그들의 미래를 앗아갈 사리는 그들에게 없다.
아마도 불행한 사태중의 가장 불행한 것은 그 같은 어린이학대의 관행이다. 전처소생이라고 해서 7살밖에 안된 어린이를 남을 시켜 각목으로 매려 숨지게 한 주부의 잔학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불행한 어린이에겐 더 마음을 쓰고 더 가여워했어야 옳을 것인데 오히려 불행한 어린이를 더욱 불행케 해서 자신조차 불행하게된 어리석음은 질로 이해하기 어렵다.
어린이 학대의 정신상황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를 용인하는 사회풍조를 반영한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없는 사회는 이리들의 살벌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일 뿐 아름다운 인간의 삶터일 수 없다. 지금 부유하고 풍족하며 권세를 누리는 혜택받은 사람들의 인간적 정감이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사회는 결국 불행한 사회일밖에 없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또 사회에서 강자들이 그들의 책임윤리를 올바로 깨닫고 지킨다면 가정과 사회는 결코 파탄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가정과 사회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더라도 그 구성원이 상호 이해와 책임의 윤리를 통해 참고 견디는 노력은 가장 필요하며 또 값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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