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인민군에 수난…철저한 반공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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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백제의 고도 부여 반월성을 돌아 부소산 정상을 오르면 눈앞에 아스라이 백마강이 펼쳐진다.
부소산기슭 부여읍 석목리 함열남궁씨가 4백여년동안 똘똘 뭉쳐 가문의 맥을 이어온 동쪽부락이다.
읍내에서 공주쪽으로 1㎞쯤 거리, 나지막한 야산모퉁이에 30여호 남궁씨들이 정겹게 처마를 맞댔다. 멀어야 10촌이내의 친척들이다.
인향조는 직장벼슬을 지낸 남궁식 그는 명종조에 성균관대사성, 형조참판, 한성부판윤등을 지낸 남궁침의 후손이다. 그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내력은 확실치않다. 다만 시조인 남궁원저이 부여와 가까운 감물아(전북맹산군 함열지방)백에 봉해진후 후손들이 전북 충남일대에 못자리를 잡았을것이라는 추측이 구전되고 있을뿐.
이 마을 남궁씨들은 해방이 될때까지 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살았다. 그러나 6·25의 란은 석목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해방직후 좌익과 우익이 격돌했던 시기에 부여군국민의 장, 민족청년단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우익활동을 폈던 남궁현씨가 바로 이 마을출신이었기 때문. 따라서 석목리는 자연히 부여지방 우익의 본거지가 되었다. 때문에 부여가 북괴군에 점령되었을때 이 마을 남궁씨들은 잔혹한 보복을 당해야했다. 부여군국민회부회장이었던 남궁탑, 양형제는 인민재판에서 처형되기도했다. 당시 이마을 남궁씨 치고 경찰서내무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얘기다.
『석목리는 신원조회가 필요없는 반공마을이여…. 뺄갱이 놈들한테 당한것 생각하면 치가 떨린단 말여. 자나깨나 「반공」해야혀….』 남궁희노인(71)이 들려주는 「6·25의 교훈」이다.
인구가 적은 탓인지 우목리 남궁서방들의 단결력은 대단하다. 지난해 10월에는 일가인 남궁관씨가 간장염으로 고생하자 종친회를 소집, 20여만원을 모아 치료비를 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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