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에 얽힌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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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조그마한 책 한권을 찾느라 남동생의 책상을 뒤지다가 동그란 면도기를 발견했다. 내가 고2때든가 아버지의 생신날 선물로 드렸던 것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신 지금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동생의 차지가 되었나보다.
나는 책찾기를 멈추고 면도기를 손에 쥔채 생각에 잠겼다.
면도하실 때마다 대야에 물을 받고 비누거품을 내어 수염을 깎으시던 아버지. 그러고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수염깎는 일을 자주 보아왔던 것같다. 거의 외가에서 크다시피한 나는 할아버지의 면도하시는 일을 제법 많이 도왔었다. 유난히 머리도 하얗고 수염도 하얗던 할아버지는 가위로 수염을 깎으셨다.
길이가 20여㎝는 되고 손잡이가 날보다 더 길던 그 가위로 할아버지는 용케도 수염을 잘 깎으셨고, 그때마다 난 조그마한 거울을 잡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비쳐 드렸었다. 그렇게 면도를 하고난 할아버지의 턱을 내가 찬찬히 살피다가 빠진 부분이 있기라도 하면 신이 나서 할아버지의 가위를 뺏어 마저 깎아드리다가 잘못 살을 짚어 피를 낸 적도 있었다. 할아버진 그 가위로 수염뿐 아니라 손톱발톱도 깎으셨다. 울퉁불퉁하기는 했었지만 하얀 수염끝이 참 좋아보이던 할아버지. 수염을 깎으실 때면 으레 나를 불러 거울을 잡게하시고 사각거리던 그 소리가 지금껏 가슴에 남게 하신 할아버지. 면도하실 때마다 면도물과 비누와 수건을 준비시키시던 아버지가 가끔 짜증나고 답답해 보여서 내가 모은 용돈으로 전기면도기를 사드린후부터 나는 그 정겨운 장면들을 모두 잊고 말았다.
지금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안계신데 그때의 그 잔심부름을 다시 한번 해드리고 싶은 간절함이 일고 있음은 웬일일까.
마치 내 어린시절의 정겹고 훈훈했던 추억을 전기면도기가 뺏어간 것처럼 문명의 이기에 대한 원망마저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강명숙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3리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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