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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쌀협상 비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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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 정부와 세계무역기구(WTO) 간에 체결된 '쌀 협상'의 국회 비준동의안이 상정조차 안 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해당 상임위(통일외교통상위)를 점거해 원천 봉쇄했고, 농민단체들은 10일 여의도 대규모 시위로 국회 전체를 압박했다. 농민단체인 전농은 12월 6일 홍콩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해외 투쟁단까지 파견한다고 한다.

정부는 국익을 위한 조속한 처리를 호소하지만, 국회에서 자기 일처럼 나서는 의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외 압력과 장내의 직무유기로 비준안이 계속 표류하고 있다. 쌀 비준안 처리 논의에 국민 전체의 이익은 뒷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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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지나면 달라지려나"=열린우리당 내 쌀협상 비준대책위 조일현 위원장은 11일 기자회견을 자청, "국회가 이래선 안 된다"며 여야를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쌀 재협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준안의 국회 처리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국가 신인도가 떨어져 국가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고 했다.

조 위원장은 이어 "그런데도 여야는 표를 의식해 동의안 상정을 추석 뒤로 미뤘다"고 말했다. 그는 "추석이 지난다고 뭐가 달라지나. 눈가리고 아옹식이다. 추석날이라도 떡 먹지 말고 국회에 나와서 (비준안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여당은 정부 측과 협의해 5일 통일외교통상위에 동의안을 상정한 뒤, 10월 본회의에서 통과시킨다는 시간표를 짰다. 비준안 처리는 연말이 마지노선이며 이르면 이를수록 국익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준안 상정 자체를 반대하는 민노당이 회의장을 점거하면서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추석 후 상정 입장을 밝히자, 민노당을 비판했던 여당도 이에 동의했다. 이로써 추석 전으로 잡아놓은 회의 일정표는 휴지조각이 됐다.

당 대 당뿐 아니라 국회 상임위끼리 책임 떠넘기기도 벌어졌다. 통외통위는 상정을 연기하면서 "쌀 협상안에 대한 농림해양수산위의 의견서를 먼저 받아야 한다"며 공을 농해수위로 넘겼다. 농촌지역 의원들이 많은 농해수위는 "비준안 심의는 통외통위의 권한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 제2의 한-칠레 협정 되나=더 큰 문제는 추석이 지난다 해서 비준안 처리를 위해 총대를 멜 의원들이 생길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쌀 문제는 농심을 자극하는 것이어서 '잘해야 본전'이란 의식이 의원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12월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서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하게 되면 쌀 협상에서도 유리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여당, 한나라당은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당 정책위 관계자는 "민노당 주장을 농민들 전체 주장으로 보기 어렵다"며 "최선을 다해 농민들의 추가 요구사항을 검토하겠지만 한없이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소속 통외통위 간사인 박계동 의원은 "재협상은 현실적으로 안 되며, 쌀의 관세화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당의 한 농촌 출신의원은 "2004년 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때와 같이 여야에 관계없이 농촌당과 도시당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국익을 위해 비준안은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이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의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만 표결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쌀협상 비준안이란=보다 정확히는 '쌀 관세화 유예 연장협상'이다. 한국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결과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국내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관세화 유예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2005년 이후 쌀 시장 개방 여부는 2004년 중 쌀 수출국과 협상키로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WTO 회원국들과 협상을 해 다시 10년간(2005~2014년) 국내 쌀 시장을 열지 않는 관세화 유예에 합의했다. 한국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10년간 의무적으로 연간 국내 소비량의 4.4~9.6%에 해당하는 외국쌀을 수입키로 했다. 정부는 이런 합의안을 국회에서 비준받기로 하고 이번 정기국회에 비준안을 제출했다.

김정욱.이가영 기자

[뉴스 분석] 쌀 협상안 올해안 비준 못 받으면 …
쌀시장 내년엔 개방해야
관례상 재협상도 불가능

정부가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과 벌인 쌀 협상안에 대해 올해 안에 국회에서 비준을 받지 못하면 한국은 쌀 시장을 열어야 한다. 지난해 정부가 미국.중국 등 쌀 수출국과 벌인 쌀 협상의 요지는 한국이 쌀 시장 개방을 10년 더 미루는 대신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할 외국 쌀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WTO 규정에 따르면 한국은 올해 안에 새 합의안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따라서 국회 비준도 올해 안에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어기면 합의안은 무효가 되고 한국은 쌀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게 정부의 해석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회원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바로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게 WTO의 법리 해석이기 때문에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등에선 올해 말로 예정된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뒤에 비준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한다. DDA 협상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하면 쌀 협상에서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DDA 협상은 이미 난항을 겪고 있다. DDA 협상 중 농업과 관련한 협상은 당초 관세.보조금 감축방식 등을 정하는 세부원칙(Modality) 초안을 올 7월까지 합의하고, 12월 홍콩 각료회의에서 최종 타결한다는 일정에 따라 진행됐다. 하지만 국가별 의견 대립으로 7월 말로 예정됐던 세부원칙 초안 합의에 실패하고 현재 협상 자체가 표류하고 있다. 올해 안에 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다. 때문에 DDA 협상 뒤에 비준을 하자는 주장은 올해 안에 비준을 안 하겠다는 뜻으로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연말로 비준을 미룰 경우 의무수입물량을 한꺼번에 확보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한다. 올해 의무수입 물량은 22만6000t으로 전체 소비량의 4.4%다. 이걸 연말에 한꺼번에 수입하려면 수입 쌀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쁜 쌀을 비싸게 사와야 한다는 뜻이다.

재협상은 더더욱 어렵다. 양자 간에 합의가 끝난 협상안을 되돌리는 것은 국제 협상의 관례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신인도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회 비준이 안 되면 내년부터 관세화를 통한 시장 개방이 불가피하다. 수입 쌀에 관세를 물릴 수는 있지만 수입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게 된다는 얘기다. 이는 농민단체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농민단체가 무리하게 '비준 연기'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요구조건을 하나라도 더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농민단체 등은 지난달 쌀 농가에 의무적으로 지급하는 고정직불금을 현행 80㎏ 한 가마 당 9836원에서 내년부터 1만1475원으로 올리는 등 20개 항을 정부에 제시한 바 있다. 비준 연기를 끝까지 밀어붙일 의도가 없음을 스스로 내비친 것이다.

다만 정부는 농민단체 요구 중 고정직불금 인상 등 16개 항만 수용했다. 정책자금의 금리 인하나 대출금 상환 연기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단체 등이 쌀 협상안 비준에 대해 강경 입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정부가 수용하지 않은 정책자금 인하와 대출금 상환 연기를 정부가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포석이란 해석이 나온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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