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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국회의원 단임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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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논설위원

누군가 엉뚱한 상상이나 소망을 갖고 있다고 하자(그게 나라고 치자). 평소엔 입 밖에 못 내지만 꼭 하루쯤 예외가 있다면 오늘일 것이다. 그게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나의 엉뚱한 소망은 거칠게 이름 붙이면 ‘국회의원 사람 만들기’쯤이다. 벌써 ‘말도 안 돼’라고 야유하시는 분, 잠깐만 참아달라. 나도 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의원 단임제’다. ‘더 말도 안 돼’ 하시겠지만, 그래도 또 참고 들어달라. 크리스마스니까.

 잠깐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통령 단임제가 왜 나왔나. 절대·제왕적·무소불위…. 이런 단어들과 묶여 대통령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됐기 때문이다. 그 통제받지 않는 권력의 힘을 뺀 게 우리가 만든 1987년 체제의 핵심이다. 6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누구나 대통령을 희화하고 가십거리로 삼는 세상이 됐다. 독재 대통령 시절 ‘그분’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TV 출연을 금지당한 어느 탤런트의 얘기는 석기시대 전설로 흘러갔다. 5년 단임제의 최대 목적이 ‘대통령 힘 빼기’였다면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다.

 그 후 30년. 또 하나의 불통·절대 권력이 생겼다. 우리가 다 아는 그 이름, 국회의원이다. 경제든 정치든 뭐 하나 하려 해도 의원님의 재가 없인 꿈도 못 꾼다. 금융회사 임직원이 인사 때면 자기 은행장 제쳐놓고 여의도로 달려간다. 기업인이 의원 보좌관 한 번 만나려면 번호표를 받아야 한단다. 정부가 만든 법안도 의원님 한마디에 시행령까지 고치는 일이 수두룩하다. 특권은 200가지나 된다는데, 책임지는 건 거의 없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부터 오로지 생각은 연임, 4년 뒤 또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만 올인하게 된다. 당연히 공천권 앞엔 ‘고양이 앞의 쥐’가 될밖에.

 단임제는 이런 갑질 권력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수 있다. 무엇보다 소신 정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공천권 눈치 안 보고 국익과 민생을 앞세우는 의원이 늘어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정치 언어도 사라질 것이다. 군인·사학연금 개혁을 놓고 엊그제 당·정이 벌인 황당무계한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내년 6·10월에 연금 개혁을 하겠다니 야당보다 여당이 더 난리를 쳤다. 당 대표는 “왜 정부 마음대로 발표하느냐”며 질타했다. 원내수석부대표는 한술 더 떴다. “여당이 정부 뒤치다꺼리하다가 골병들 지경”이라며 “반드시 문책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국민이 보면 정부는 당연히 할 일을 한 거다. 그런데 이 국회의원님들 왜 이러시는 걸까. 평소 소신은 개혁이라던 분들 아니던가. 속내가 “이러다 나 연임 안 되면 당신(정부)이 책임질 거야”이기 때문이다. 정치 언어는 가끔 이렇게 현실 언어로 번역해줘야 분명해지는데, 역시 단임제가 되면 사라질 풍경들이다.

 둘째, 지방자치가 저절로 될 것이다. 군수·구청장이 국회의원에게 줄 서지 않게 될 것이다. 셋째, 국민 경선이니 오픈 프라이머리니 뭐니 공천권을 민주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넷째, 전직 국회의원이 늘어나니 특권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뭐든지 흔해지면 값이 떨어진다. 의사·변호사들이 정원 늘리는 데 왜 그렇게 반대해왔겠나.

 너무 충격이 크면, 약간 완화할 수도 있다. 상위 10%만 연임 출마를 허용하거나 하위 30%만 연임을 불가하는 식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비율은 조정하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매년 국회의원 평가를 하면 국정 감시 효과도 커질 수 있다. 몇몇 의원에게 물었더니 당장 “국회의원 수준을 우습게 보지 말라. 단임제 하면 국회의원 질 떨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건 걱정 안 한다. 대한민국 국민 수준을 우습게 보지 말라. 절대 지금보다 떨어질 리 없다.

 이런 발상의 최대 단점은 현실성이 없다는 거다. 스님이 어디 제 머리 깎겠나. 국회에서 통과될 리가 없다. 그렇다고 국회의원 여러분, 방심 마시라. 정치는 상상력의 산물이라지 않나. 5년, 10년 뒤에도 국회가 ‘통제받지 않는 권력’에 머물러 있다간 단임제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극도의 상상력은 가끔 현실이 되기도 하니까. 크리스마스에는 특히. 메리 크리스마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