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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엘 참사, 과잉 보증 해소 계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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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혁신 가전업체로 불리던 모뉴엘 신화가 거짓으로 드러나기 두어 달 전, 한 벤처기업인이 이 회사 얘기를 했다. 십수 년에 걸쳐 어렵게 ‘1000억 벤처’에 오른 그는 “다른 분야도 아닌 제조업체가 불과 4~5년 만에 그렇게 덩치를 불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거래처 하나 확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업하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는 “출장길에 둘러본 미국과 유럽의 가전매장에서 모뉴엘 제품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단가와 물량을 부풀려 ‘수출 돌려 막기’를 하는 것 같다”던 그의 우려는 얼마 뒤 사실로 드러났다.

 초단기간에 ‘1조 벤처’ 신화를 이뤘다던 모뉴엘의 허망한 붕괴는 한국 금융시스템의 취약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허위 수출된 액수가 3조가 넘고, 은행이 물린 돈만 7000억원에 가깝다. 그런데도 금융권은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 관세청과 검찰이 수사에 나서고야 전모가 밝혀졌다. 떼이게 된 대출은 대부분 한국무역보험공사나 기술보증기금의 보증서 담보대출이거나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은행 대출이다. 결국 국민의 부담이다.

 지나고 보니 어이없지만, 구조는 사실 단순하다. 회사 규모가 작을 때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기금 같은 정부기관에서 보증을 받는다. 산업은행 출자라도 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액수는 중요치 않다. 이들의 보증이나 출자는 금융권에서 곧 ‘될 만한 기업’이라는 증명서 역할을 한다. 몇 년간 수출실적이 쌓이면 장관이나 총리 표창을 받는다. 모뉴엘처럼 ‘히든 챔피언’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나쁜 마음을 먹어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은행이 서로 싸게 돈을 빌려 주겠다고 앞다퉈 찾아온다.

 이를 가능케 하는 배경은 뭘까. 여러 진단이 있겠지만 정부 보증의 과잉을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현재 운영되는 보증기관만 해도 여럿이다. 무역 거래는 무역보험공사, 기업 보증은 신용보증기금, 기술·벤처 보증은 기술보증기금이 각각 맡고 있다. 수출 단계에선 수출입은행이나 산업은행, 기업은행이 지원한다. 지원 영역과 단계가 다르다지만 모뉴엘에서 보듯 결과적으론 겹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는 일이 비슷하고 정부에서 독려까지 하니 ‘밥그릇 싸움’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렇게 실적 확보에 치우치다 보면 심사와 관리가 허술해진다. 2010년 코스닥을 떠들썩하게 한 ‘네오세미테크 사태’, 올해 금융권을 뒤흔든 ‘KT ENS 사태’도 이랬다.

 정부 보증은 언제나 위험을 내포한다. 은행 입장에선 위험도 책임도 없다. 기업이 나자빠져도 돈을 받을 수 있으니 기업이 무슨 일을 하는지, 실적이 맞는지를 굳이 챙길 이유가 없다. 정부가 은행이 되고 은행은 금고지기로 전락한다. 하물며 과잉 보증 상태라면 이런 위험은 더 커진다. 정말 ‘창조금융’을 할 거라면 이런 정책금융부터 개혁하는 게 첫 순서일 것 같다.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