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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강성현] ‘난징 대학살’을 고발한 장춘루(張純如)의 비극적 최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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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무렵, 아이리스 장(Iris Chang, 중국명 장춘루, 1968~2004)이 쓴《난징 대학살(The Rape of Nanking), 김은령 역》이란 책이 국내에 소개됐다. 중국에는《난징폭행 : 잊혀진 대도살南京暴行 : 被遺忘的大屠殺》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을 읽은 뒤 받은 충격은 쉬 가시지 않았다.

책에는 난징시민을 구하러 나섰던 외국인과 희생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담긴 30여 장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희생된 이들의 처참한 모습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한 두 해가 지나고 학살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 호형호제하던, 난징대 교육학과 왕윈라이(王運來, 54) 교수의 안내로 ‘난징 대도살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입구에 ‘도살(屠殺)’이라 적힌 문구를 보니 왠지 섬뜩하다. 이 기념관에는 고문, 강간, 생매장 당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일본군인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된, 남녀노소들의 해골이 흙 가운데 드러난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 난징 사람들이 가기를 극구 꺼려한다는 그 곳에 혼자 또 갔다.

이 책은 한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내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오랜 세월 잠을 잤다. 티브이를 켜자 난징대학살 추도회 장면이 보인다. 2014년 12월 13일은 난징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77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이 날이 오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리며 무고하게 희생된 원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 국민이 묵념을 한다. 중국 정부는 올해부터 이 날을 국가 공식 추도일(國家公祭日)로 지정하였다. 다시금 비명에 간, 장춘루가 떠오른다.

장춘루는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 2세다. 양친 모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30년 간 물리학? 미생물학을 연구한 과학자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로부터 난징 대학살에 관해 들어, 이 사건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부모는 중일전쟁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딸도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기를 바랐다. 장춘루는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한 때 잠깐 기자로 일했다. 결혼 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 3 년여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쓴《난징 대학살》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장춘루 또한 이 한 편의 작품으로 인해 일약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2004년 11월, 캘리포니아 주 고속도로 변 차안에서 장춘루는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되었다. 1997년《난징 대학살》출간 후, 일본 우익분자들의 협박에 줄곧 시달려 온 것으로 전해졌다. 증언자의 말을 토대로 자살로 추정하였다. 미국인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마감한 36세의 짧은 생애였다. ‘잊혀진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일깨우려한 용기가 결국 그 녀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난징대학살’의 또 다른 희생자인 셈이다.

1937년 12월 13일 국민당의 수도 난징이 함락돼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이듬해 1월 하순에 걸쳐, 일본의 ‘인간 병기’들은 난징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6주라는 짧은 기간에 무려 30 여 만 명이 ‘도살’됐다. 이른바 ‘난징대학살’이다. 그 죽이는 방식이 너무나 끔찍하여 차마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잠시 아이리스 장이 묘사한 끔찍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일본 군인들은 2만~8만에 이르는 여성들을 강간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을 도려내고, 산 채로 벽에 못을 박기도 했다. 생매장, 거세하기, 신체 장기 도려내기, 산 채로 불태우기 등 이 다반사로 행해졌다. 심지어 혀를 뽑아 쇠갈고리에 꿰어 걸어 놓거나, 허리까지 파묻은 후 독일산 셰퍼드의 먹이로 삼는 등 악마적인 행위가 버젓이 저질러졌다.”

‘살인기계’들이 미쳐 날뛰던 곳에 수호천사도 존재하였다. 진링(金陵)여자문리대학 교육학부 학부장, 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 1886~1941, 중국명 魏特琳),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John Rabe, 1882~1950, 중국명 ?翰·拉?), 외과의사 로버트 윌슨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전지대를 만들어 미처 피난하지 못한 난징시민들을 대피시켰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5 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구하였다. 특히, 나치당원이자 안전지대 대표였던 욘 라베는 중국인들 사이에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불렸다. 장춘루는, 그를 유태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에 빗대,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라 칭하였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난징에서 자행된 살육은 서막에 불과하였다. ‘살인 병기’들이 저지른 광기는 중일전쟁 8년 내내 그칠 줄 몰랐다. 장춘루는 이 기간 동안 약 1900만 명의 중국인들이 희생됐다고 추정한다. 아울러, 스스로에게 캐물었다. 무엇이 일본 군인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들었는가? 역사학자, 목격자, 피해자, 가해자들의 의견과 증언을 종합한 결과, 천황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 일본군대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구타 용인, 중국인에 대한 경멸심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중국인에 대한 일본 군인의 경멸심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춘루의 증언을 일부 인용해본다.

“일본군인은, 중국인을 죽이는 것을 벌레나 가축을 죽이는 것처럼 생각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일본 장군이 한 특파원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중국인을 인간으로 볼지 모르지만, 나는 중국인을 돼지로 생각하오.’ ”

일본 장군의 ‘인면수심(人面獸心)’에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다. 베일에 가렸던 ‘난징 대학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장춘루는 사투를 벌였다. 본 책의 서두와 말미에, 소명(召命)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일본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길고 힘든 작업 중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많은 일본 정치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산업 분야 지도자들이,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살 자체를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인의 용의주도한 시도를 보며 이 책이 필요하다는 나의 확신은 더욱 커졌다.”

장춘루는 마치 ‘난징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일본이 학살에 대해 인정하기 전까지, 일본 문화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울러, 이 사건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첫째, 일본의 행위는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위험한 정부가, 본성을 저버린 인간에게 위험한 논리를 강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십대들이 갖는 천성 중 좋은 부분을 억압하고, 그들을 어떻게 ‘살인병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지 이 사건이 잘 대변해준다.

둘째, 역사를 통해 인류가 저지른 대량 학살의 패턴을 연구한 사람이라면, 정부의 권력 집중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발견할 것이다. 어떤 제재나 견제도 받지 않는 권력은 난징 대학살과 같은 잔인한 사건을 언제라도 일으킬 수 있다.

셋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우리들은 수동적인 방관자로서 그저 비통해 할 뿐이었다. 악행이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데도 그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해, 자신에게 별 위험이 되지 않는다면 이를 용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작가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 던졌다. 일본 단체의 공갈? 협박도, 우울증도 뒤로 한 채 영원히 잠들었다. 장춘루가 죽은 후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도살 기념관 내에 동상 및 장춘루 기념관이 건립됐다. 그리고 ‘난징! 난징!’, ‘진링의 13소녀(金陵的13少女)’ 등이 영화로 제작됐다.

그녀는 떠났으나 ‘학살’의 가해자는 오늘도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꾼다. ‘총칼로 일어선 민족은 총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일본 정부는 망각한 것 같다. 장춘루는《난징 대학살》을 집필하면서 줄곧, 아래의 경구를 되새겼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 한다(George Santay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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