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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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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1994~2000년)였던 시절 어느 해. 텍사스엔 심각한 이상 고온 현상과 삼림 화재가 발생했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부시는 급히 기자회견을 했다. 회견 도중 그는 주 산림국 관리를 연단으로 불렀다. 그리고 재난 대처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래 놓고선 한눈을 팔았다. 관리가 말하는 동안 부시는 기자들을 향해 복어처럼 뺨을 부풀리고 혀를 내밀어 입김을 내뿜는 등 익살스러운 행동을 했다고 뉴욕 타임스 기자는 적었다. (저스틴 프랭크, '부시의 정신분석')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석 달 뒤.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의 한 행사에서 "당시 테러 사실을 보고받고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답은 걸작이었다. "나는 플로리다의 한 학교에서 독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TV를 통해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치는 걸 봤다. 조종 경험이 있는 나는 '저런, 저렇게 조종을 못할까'라고 말했다. 이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자 실언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라고 했다."

부시는 그해 말 "올해는 나와 로라(부인)에게 멋진 한 해였다"고 했다. 9.11을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해서도 무신경.무감각을 노출했다. 카트리나가 멕시코만 일대를 초토화한 지 나흘 만에 처음으로 피해지역을 찾았으면서도 '처삼촌 묘 벌초하듯' 건성건성 둘러봤다. 이재민이 "옷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자 "구세군에 가보라"며 남의 일 대하듯 했다. 뉴올리언스의 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수없이 나왔는데도 태연하게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뉴욕대 언론학과 마크 크리스핀 밀러 교수는 부시에게 언어장애가 있다고 했다. "소비(consumption.보존이란 뜻인 conservation의 잘못)를 격려하는 에너지법안이 필요하다"는 등 이상한 말을 자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재난상황에서 처신하는 걸 보면 '공감(共感)장애'마저 있지 않나 싶다. 불행을 당한 이들을 보듬는 가슴이 좁아 보이는 탓이다. 화룡선(畵龍扇.궁중에서 쓰던 용그림의 큰 부채)처럼 도량이 큰 지도자를 만난다는 건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쉽지 않은가 보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