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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0) 제79화 육사졸업생들 (63)|제주도의 좌익세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46년10월 내가 육사부교장으로 있다가 제9연대를 창설하러 제주도로 떠날 때 육사교장이던 원용덕소령댁으로 인사차 들른 일이 있다. 그때 원소령은 제주도엔 빨갱이가 많으니 조심해서 잘해보라고 일러 주었다. 당시 경비대사령관인 미군「배로스」중령도 만났는데 같은 얘기였다.
내가 현지 ?슬포에 부임한 후 인근기관장과 부락민들이 나의 부임을 환영하는 자리를 마런해 주었다. 말하자면 한턱 내는 것이었다. 당시의 제주도 관습으로는 새끼가 든 암퇘지를 통째로 삶아내는 것이 최대의 손님접대였는데 그 날 배가 불룩한 암퇘지 한 마리가 나왔다.
그때는 아직 전기가 거기까지 들어가질 않아 방에 횃불을 켜놓고 판을 벌였었다. 제주도의 후한 인심이 역력히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그런데 젊은층에서는 나에게 귀에 거슬리는 질문들을 해왔다. 『경비대가 미국의 용병이지 무슨 국군이란 말인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과연 좌익세가 세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해방 당시 제주도 인구는 15만명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외국에 나가있던 도민들이 몰려들어 48년에는 이미 30만명이 넘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던 송금은 줄고 인구는 두배로 늘어 생활도 그만큼 어려워지고 제주도 고유의 풍습과 질서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귀국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나 만주·중국,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 있던 사람들도 있어 이들과 함께 좌익사상도 묻어왔다. 어떤이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좌경화됐고, 어떤이는 독립후 새나라의 건설방향으로 공산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공계팔로군에서 군사경험을 쌓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뒤얽혀 순박하던 제주도가 과격한 좌익사상으로 물들게 됐던 것이다. 47년에는 이미 백미공출반대운동과 납세불납운동을 벌였고 그로인해 이섬의 행정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됐다.
47년5월 내가 경비대 사령부 작전교육처장으로 전출되자 이치업소령(군영·예비역준장·도로공사 상임고문)이 제2대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올해 61세인 그는 당초부터 확고한 반공·우익사상을 가진 장교로서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에 3기생출신의 문상길중위가 중대장으로 9연대에 부임했다. 충남태생인 그는 대전의 제2연대에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연대장의 추천을 받아 사관학교에 입교한 자인데 입대전부터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육사에서는 좌익계의 오일균·조병건등이 도사리고 앉아 생도들을 포섭·세뇌시키고 있었으니 문상길의 좌익사상이 더욱 강화됐을 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때 이미 제주도의 좌익세들은 제주도출신으로 학병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김달삼과 조노구가 중심이 되어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산하에 들어가 각종 좌익단체를 만들어 활약하고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남로당 군사부 직속의 제주인민해방군도 조직돼 있었다.
제주도의 시·읍·면에 1개중대씩 12개중대로 편성돼 있던 인민해방군의 사령관은 당시 32세이던 학병출신 이덕구였고 조직부장은 명치대학 출신의 김민성이었다.
총병력은 무장병 5백명과 비무장 1천명이었는데 이들의 훈련은 팔로군출신들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문상길은 제주도에 부임한 이후 김달삼·이덕구등과 접선하여 9연대장병들을 포섭, 연대전체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공작의 방해 인물이 바로 반공 우익의 이치업 연대장이었다. 그래서 문은 포섭된 세포를 시켜 어느날 연대장 점심식사에 독약을 넣었다.
이소령은 1개월간의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단순한 식중독으로 알고 넘어갔다. 이것이 좌익계의 독살극이라는 것은 후에 문상길이 체포되어 자백함으로써 밝혀졌다.
그후 47년12월 김익렬소령 (군영·예비역중장·경남하동)이 후임 연대장으로 내려갔다. 이때는 이미 제주도의 좌익계가 세력을 크게 늘려 경찰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중앙에서는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수립을 기본방침으로 정하여 5·10총선거를 추진하고 있었다. 북괴와 남로당은 이를 저지키 위해 폭동과 파업을 일삼았다.
48년2월7일「구국투쟁」이라는 폭동이 전국적으로 일어 났고 3·1절 행사를 빙자하여 도처에서 봉기·파업·방화가 일어났다. 그런 소란은 좌익세가 강하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특히 심했다. 섬의 치안은 완전 마비상태였다.
이에 중앙에서는 충남·전남도경에서 경찰지원대를 차출하여 보내 난동을 진압했다. 월남한 극우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가서 치안업무를 맡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본토에서 건너간 지원세력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아 오히려 좌익의 선전과 도민의 불만대상이 되었다. 제주도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하나의 거대한 화약고였다. 여기에다 좌익이 불을 지른 것이 제주도 4·3폭동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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