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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일색 양당 구조론 한계 종북 아닌 진보엔 길 터줘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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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01면

통합진보당 해산 이틀째인 2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경찰 추산 800명(주최 측 추산 2000명)이 모여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진보연대가 주최한 시위엔 통진당 관계자와 10여 개 진보단체가 참석했다. 정진우(NCCK인권센터 소장) 목사,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의 얼굴이 보였다.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는 “박근혜 정권은 당선 2주년이던 어제 반대세력을 암살했다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광교~보신각~을지로~서울시청으로 도보 시위를 벌였다.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상징하는 ‘근조 민주주의’ 피켓을 든 이들이 많았다. ‘민주주의 사망 선고, 박근혜 독재 퇴진’ 문구가 붙은 상여가 맨 앞에 섰고,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 등이 적힌 만장을 든 이들이 뒤따랐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현 체제로는 정치적 소수파 대표할 정당 찾을 수 없어”

보수 쪽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으로 평했다고 20일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전했다. 앞서 전날 오전 10시10분 헌법재판소 부근 한 주유소 앞에선 “통진당 해산이 확실시된다”는 말이 퍼지면서 보수단체 인사 200여 명이 함성을 질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얼싸안기도 했다. 누군가 “대한민국을 반역할 권리는 없다”고도 소리쳤다. 8년 전 탈북했다는 이모(55)씨는 “통진당원들의 말은 북한에서 듣던 교육 같더라. 이석기 일당이 TV에 나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힘들었는데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은 ‘방어적 민주주의(militant democracy)’에서 근거를 찾는다. 민주주의의 우산 아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적(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위헌정당 해산 같은 ‘전투적’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보의 범위를 확인하는 계기”(안도경 서울대 교수)라거나 “북한의 인권 탄압과 핵개발, 포격 도발에 침묵한다면 진보가 될 수 없는데 이를 더 분명히 해준 결정”(김형준 명지대 교수) 같은 평가도 있다.

반발하는 진보 진영은 걱정도 크다. “통진당 해산 조치가 진보정치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그런 분위기를 대표한다. 종북과는 거리를 둔 채 노동조건 개선, 환경보호 등을 추구해온 진보정당들까지 통진당과 ‘한통속’으로 매도되면 안 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소수이지만 결속력 강한 통진당 지지층의 존재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진당은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의 연대 협력으로 2012년 총선에서 10.3%(200만여 표)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석기 전 의원이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된 뒤 치러진 올해 6·4 지방선거에서도 통진당은 4.3%(광역비례 정당득표율)를 획득해 37명의 당선자(광역비례 3, 기초비례 3, 기초 31)를 냈다. 정의당(기초 9, 기초비례 1)과 노동당(광역 1, 기초 6) 등 다른 진보정당들을 크게 앞질렀다. 당원 수도 9만8792명(선관위 2013년 12월 31일 기준)이 넘어 진성당원이 1만 명 전후인 다른 진보정당들(정의당 9578명, 노동당 1만3255명, 녹색당 6085명)보다 많다. 통진당은 평소 조사에서 1%대의 지지율을 유지해 왔다.

김종철 노동당 전 부대표는 “통진당이 종북 논란에도 표를 얻은 건 지역과 현장에서 약자와 함께하는 당원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익명을 원한 또 다른 진보정당 고위 간부는 “이런 노력을 해온 정당이 강제 해산됐으니 반발이 적지 않은 것”이라며 “2016년 총선을 계기로 재조직화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시각은 통진당 해산에 따라 지지정당이 없어진 소수파를 수용할 건전한 진보정당의 성장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이국영(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는 “엄청난 비판을 받고도 지지율 1% 이상을 유지하던 정당이 없어졌다”며 “의사를 표출할 통로가 막혀버린 정치적 소수파를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 성향이 강한 거대정당들의 독점 구조로는 최하층 서민의 혁신이나 재분배 요구를 제도권 정치에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회 갈등과 양극화가 심화할 경우 제도권 정치의 소화 능력은 곧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우려 역시 그런 맥락이다. 결국 기존의 정당체제로는 국민의 일부가 자신을 대표할 정당을 찾을 수 없으므로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비례대표제를 대폭 확대해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을 촉진하고, 반(反)원전이나 먹거리 보호 같은 틈새 의제에서 ‘소금’ 역할을 해온 진보정당의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보수 진영에서도 통진당 해산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통진당 해산을 ‘보수의 승리’로 해석하는 데 그치지 말고 건전한 진보세력을 포용해 정치발전을 이룰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다. 통진당 지도부와 같은 486 운동권 출신인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보수가 통진당 해산 결정을 승리로 여기면서 자신을 혁신하지 않은 채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비민주적 습성을 답습하는 순간 제2, 제3의 통진당은 또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을 계기로 진보 진영 일각에선 세력 재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됐다. 우선 함세웅 신부, 명진 스님,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등 진보 인사 100여 명은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준비 중이다.

이들의 대변인 격인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은 19일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정치인을 발굴하고, 정당들 간에 통합도 촉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번 주 중 구체적인 활동 구상을 밝힐 예정이다.

한편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 등 진보진영지도자들은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대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부담스러워했다. 종북과는 선을 그어야 하지만 헌재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어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정의당 관계자는 “통진당의 해산 사유 중 하나인 ‘진보적 민주주의’란 어구는 정의당과 노동당의 강령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들어 있어 향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 관계기사 3~5p

백일현 기자·송영오 인턴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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