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정치인이면서 "모범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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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9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박순천여사 정치인여자 여성운동가였고 신문사장에 교육자였던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1898년9월10일 경남동래군기장면대변리의 한적한 어촌에서 한학자의 외동딸로 태어난 朴여사는 19l7년 부산진 일신여고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고향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마산 의창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여사는 만세운동의 조직과 연락임무를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순천댁」으로 위장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본명인「명년」대신「순천」이 이름이 됐다.
출옥 후 일본여대 사회학부에 진학했고 이때 알게 된 변희용씨(전 성균관대총장·작고)와 결혼했다. 결혼해 귀국 후 부군의 고향인 경북상주에서 야학·유치원·탁아소등을 경영하면서 12년간이나 농촌계몽운동을 벌었다. 귀국하자마자 일경의「요시찰인」으로 다른 일정한 직업은 구할 수 없었다.
박여사는 서울로 올라와 금강전구공장에서 여공감으로 일하며 근로여성과의 생활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황신덕씨(현 중앙여고이사장)와 손잡고 1940년에 경성의숙을 설립했다.
해방을 맞아 박여사의 활동은 여성운동과 교육에서 정치분야로 옮겨지게 된다.
7명의 동지와 함께 전국부녀동맹준비위를 조직했고 2대 국회때는 종로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디뎠다. 부산정치파동 때에는 발췌개헌안을 끝내 지지하지 않은 3명중의 한사람이었다.
그 후 4, 5, 6, 7대 의원을 역임하면서 박여사는 항상 경상도사투리가 섞인 특유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정부를 날카롭게 비관하는 중진야당정치인이 되었고 선거유세나 강연에서는 인기 있는 연사였다.
사사오입개헌파동을 계기로 박여사는 민주당발기인이었고 66년 6월엔 통합야당이었던 민중당의 당수가 되어 제1야당 최초의 여성당수가 됐다.
정치생활을 하면서도 모범적인 가정주부로서도 정평이 나있었다.
67년 현역의원을 떠난 후 76년에는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이사장으로 일했고 80년부터는 국정자문위원으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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