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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허리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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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609년 영국 범선 하나가 버지니아로 가던 중 좌초했다.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실종됐다. 그러나 2년 후 죽은 줄 알았던 난파선 일행들이 카리브해 북부 버뮤다 섬에서 구조된다. 런던 시민 모두가 흥분에 휩싸였다. 셰익스피어도 그중 하나였다. 영감을 얻은 그는 곧 희극 '템페스트'를 집필한다.

범선을 집어삼킨 템페스트(폭풍)가 바로 허리케인이었다. 마야인들이 '하늘의 신'을 일컫던 '우라칸'에서 유래한 말이다. 과거의 허리케인 역시 파괴적이었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의 희곡만큼이나 낭만적이었다. 미국에는 고지대 호텔에서 차를 마시며 폭풍이 해안을 휩쓰는 장관을 감상하는 '허리케인 관광'까지 있었다. 신의 뜻이기에 거역할 수 없다는 순응의 낭만이었다.

오늘날 허리케인은 더 이상 하늘의 뜻이 아니다. 허리케인의 힘은 바닷물이 증발할 때 대기권으로 전달되는 열에 따라 결정된다. 해수면 온도가 높고 더운 물이 바다 깊숙한 곳까지 존재할수록 강력해진다. 지구가 따뜻해질수록 허리케인이 잦고 강해진다는 얘기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 행위의 결과다. 미 상무부의 수퍼컴퓨터는 2080년이면 현재 최고인 5등급을 넘어서는 5.5등급 울트라 허리케인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래도 2003년 밝혀진 미 국방부 비밀 보고서에 비하면 낙관적인 편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2007년이면 네덜란드 헤이그 등 유럽 해안도시들이 물에 잠긴다. 해류 순환 변화로 2010년에서 2020년 사이 영국과 북유럽의 기온이 낮아져 시베리아처럼 된다. 이 지역 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남유럽과 미대륙으로 몰려든다. 대규모 난민과 보트피플을 막기 위해 일부 국가는 요새화된다. 전쟁과 가뭄.기근.폭동 등으로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기후 변화에 따른 위기가 다음 세대가 아닌 현재 우리 세대를 위협하는 현실이라는 경고다. 이런 보고서까지 작성해 놓고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한 미국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미국만 손가락질할 일도 아니다. 4월 최고 기온이 34도까지 오르고 열대야 현상까지 나타나며 진달래가 예전보다 한 달이나 먼저 피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더욱 강력해진 태풍 나비가 다가오고 있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