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대피령에도 빈민들 탈출 못해 숨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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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카트리나의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다.

아무리 강력한 허리케인이라 해도 최강국 미국에서 어떻게 수천 명이 희생(추산치)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일고 있다. 같은 자연재해라 해도 허리케인은 지진과 다르다. 지진은 갑자기 일어나지만 허리케인은 언제, 어디를 향할지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언론들은 지난달 26일부터 카트리나의 강도, 예상 경로 등을 예고하며 경계령을 발동했다. CNN.폭스뉴스 등 뉴스전문 방송들은 24시간 생방송으로 카트리나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전했다. 8월 28일 뉴올리언스시 당국은 모든 시민에게 긴급대피령을 내렸다. 카트리나가 상륙하기 전이다. 그런데도 희생자가 이렇게 많이 발생한 까닭은 뭘까.

뉴욕 타임스는 1일자 칼럼에서 "카트리나가 미국 사회를 한꺼풀 벗겨냄으로써 그 밑에 있던 불평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889년 펜실베이니아 대홍수, 1900년 텍사스 허리케인 때에도 빈민층이었던 폴란드인과 흑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번 희생자의 대다수도 빈민이었다. 이들 중엔 승용차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현지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발이나 다름없는 차가 없어 이들은 도시를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트리나가 닥치기 전 이들은 "피난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타고 갈 차도 없고, 반겨주는 곳도 없다. 그러니 그냥 있을 수밖에…"라고 답했다.

한 이재민은 "주 정부, 시 정부 등이 동원할 수 있는 그 많은 스쿨버스와 차량은 다 어디 갔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인터넷에선 "부자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남아있던 가난뱅이들만 죽었다"는 말들이 퍼져나가고 있다.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빈곤층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주민의 23.2%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산다.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미국 전체 평균의 70% 정도에 불과하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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