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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도 김치 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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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인들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생활하는 동안 감마선 조사로 살균 처리된 우주식을 먹고 있다.

깨끗한 물에 과일을 씻는다. 펄펄 끓는 물에 행주를 삶는다. 숯불에 삼겹살을 지글지글 굽는다. 자장면집에서 단무지에 식초를 듬뿍 붓는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각자 다른 상황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동이지만 그 목적은 하나다. 바로 '세균 박멸'이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박테리아를 없애려는 노력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돼 왔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물에 씻는 것만으로는 완벽하게 감염성 세균을 없앨 수 없는 데다 모든 음식을 삶거나 구워서 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식품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세균을 없애는 데 그동안 '가스 살균처리법'이 쓰여왔다. 음식을 밀폐된 방안에 둔 뒤 에틸렌옥사이드(EtO)와 메틸브로마이드(MeBr) 등으로 만든 가스를 가득 채워 살균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화학물질이 오존층을 심각하게 파괴하며 잔류 물질이 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단계별로 사용 금지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가장 효율적인 살균법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게 바로 '방사선 조사(照射)법'이다. 방사선을 식품 등에 쪼여 그 속의 세균.박테리아를 파괴하는 것이다. 특히 감마선의 경우 플라스틱.알루미늄까지 투과할 수 있어 이미 포장된 제품의 살균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 감마선 조사의 원리=감마선을 얻기 위해선 코발트60(Co-60)이나 세슘137(Cs-137) 등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사용된다. 방사선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방 안에 이 원소들을 넣어두면 감마선이 저절로 흘러 나와 방안을 돌아다니게 된다. 이 방을 가로지르는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살균하고자 하는 제품을 집어넣으면 U자 형태로 굽은 벨트를 따라 한바퀴 돌아 나오는 동안 감마선이 골고루 쪼여진다. 보통 살균에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강한 빛 때문에 산화가 일어나 섬유소가 다소 물러질 수는 있으나 온도 변화가 없기 때문에 냄새.맛 등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감마선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DNA를 끊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 또 감마선이 가지고 있는 이온화라는 성질도 세균 박멸에 큰 역할을 한다. 감마선은 세균 속 수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세균의 DNA나 효소를 공격,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쪼이는 감마선의 양에 따라 죽는 세균.박테리아의 종류도 달라진다. 보통 식품에 쪼이는 방사선 양을 측정할 땐 Gy(그레이)라는 국제 단위를 쓴다. 감마선을 쪼이는 물질 1kg이 1J(줄)의 에너지를 흡수한 상태를 말한다. 0.5~3kGy를 쪼이면 진드기.바퀴벌레 등을 죽일 수 있고 1~5kGy면 대장균.살모넬라균.장티푸스균 등을 살균할 수 있다. 5~10kGy까지 쪼였을 땐 비브리오균.포도상구균, 30kGy까지 쪼일 경우 구제역균과 각종 바이러스를 모두 없앨 수 있다.

◆ 다양한 활용=감마선 조사는 거의 대부분의 식품에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간장.된장.고추장 분말 등의 발효 식품에 유용하다. 상온에서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되므로 세균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날 것으로 먹는 생식용 곡류에도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미항공우주국(NASA)에서는 1960년대부터 우주인들이 먹을 음식을 감마선 조사로 살균처리하고 있다. 음식 속에 미생물이 남아 있을 경우 우주공간 속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비축해 놔야 하는 미군 군용식량(MRE:Meal Ready to Eat)도 부패가 쉬운 재료의 경우 감마선 조사를 거친다. 에이즈 환자 등 감염에 치명적인 환자의 멸균식 제조에도 감마선 조사가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께 계획돼 있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탄생에 맞춰 감마선 조사로 살균 처리된 '한국식 우주식량'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연구하고 있는 게 바로 '우주 김치'다. 김치가 가장 맛있을 80% 정도의 발효가 끝났을 즈음 감마선을 쪼여 유산균을 포함한 모든 세균을 없앰으로써 우주 공간에서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방사선 조사가 활용되는 범위는 비단 음식뿐 아니다. 무균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의료용품이나 화장품에도 쓰인다.

현재 미국 55곳, 독일 11곳, 일본 14곳, 프랑스 6곳 등 전 세계적으로 250여 곳에서 방사선 조사시설이 가동 중이다. 우리나라엔 경기도 여주에 식품용 상업적 다목적 감마선 조사처리 시설이 설치돼 인삼이나 알로에 분말, 버섯류, 수출용 농산품 등을 살균하고 있다. 이렇게 방사선 조사로 살균된 식품에는 '라듀라'라는 방사선 조사처리 마크가 붙어 판매된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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