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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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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안도현(1961~ )

비닐조각들이 강가의 버드나무 허리를 감고 있다

잘 헹구지 않은 손수건처럼 펄럭인다

몸에 새겨진 붉은 격류의 방향,

무결 무늬의 기억이 닮아 있다

모두들 한사코 하류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홍수가 지나갔다. 도도한 황토물이 집과 논밭과 다리와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햇빛이 나자 곳곳에 붉은 황토를 뒤집어쓴 비닐조각들이 나뒹군다. 비닐조각은 인간들 삶의 꿈과 사랑을 싸안고 있던 것이다. 그 꿈과 사랑이 버드나무의 허리를 휘감고 눈물 젖은 손수건처럼 바람에 펄럭인다.

살아남은 자들이 강가로 나와 한사코 하류 쪽을 가리킨다. 하류 쪽을 가리키는 사람들의 손가락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 눈물이 급류를 타고 흘러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 도대체 하류 쪽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떠내려갔는가. 마을에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통곡소리가 들린다. 홍수가 지나간 뒤의 적막하고 절망스러운 풍경이 간략하지만 처절하고 선명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살아남기 위하여 열심히 땀을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고 삽질을 할 것이다. 어머니를 잃고 아내와 남편과 자식을 잃었더라도 묵묵히 다시 전기를 잇고 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침묵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이 바로 신의 고통일지라도,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죽어가는 모습일지라도 오랫동안 신을 원망할 것이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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