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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엔 잊고잇던 사람들에 정담긴 정담긴 사연 적어보냈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전 이삿짐을 꾸리다가 문득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게 있어 주워 보았다.
누렇게 변색된 한장의 편지봉투였다. 그대로 휴지통에 넣을까 하다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부대 병장 김모씨가 10여년전 내게 보낸 편지였다.
『친애하는 H양. 보내준 위문편지 고맙소. 우리 전방의 친우들은 이런 편지를 받는 섣달이 가장 기다려지고 즐겁다오.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박아 쓴 편지를 손에 들면, 우리가 왜 이 혹한속에서 이 고생을 하는가에 대한 정연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오. 시간이 허락한다면 잊지말고 가끔씩 편지 주기 바라오.
그것만이 우리를 먼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힘을 솟구치게 하는 일이오.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H양의 편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소.』
까만 볼펜으로 큼직큼직 비스듬히 갈겨 쓴 글씨가 편지지 위에서 몸을 비틀며 금세라도 기어나올 듯 숨쉬고있었다.
여고시절 학교 선생님의 강요에 못이겨 국어시간에 무더기로 써서 보냈던 위문편지-.
그 편지에 대한 어느 병사의 답장이었던 것이다.
그 문면에 담긴 정어린 사연을 읽어내리다 문득 오래잊었던 전선 장병들을 생각해냈다. 학창시절 이후 나는 군인 아저씨들께, 아니 이제는조카뻘쯤 된 나보다 연하의 군인들에게도 단 한장의 편지를 띄운 기억이 있던가.
이 낡은 편지로 하여 나는 며칠동안 가슴속에 말끔히 흐르지않는 물결을 담고 있었다.
눈을 들면 고지와 고지가 이어지고. 눈덮인 산과 산이 첩첩이 침묵하며 서있는 황막한 전방.
하루, 한달 내내 북쪽 경계선만을 응시하며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젊은 병사들…. 이들에게 잠시 휴식이라도 있을라치면 무슨 생각에 골똘하게 될까.
크리스머스의 화려한 이브를, 낯익은 고향 언덕 위에서있는 교회당의 따뜻한 불빛을, 오순도순 나누는 식구들의 정담을 그리워하게 될것이다.
그 그리움 속에 느껴오는 것은 오로지 소외감 뿐이리라.
우리가 보내는 작은 엽서하나, 한장의 짤막한 편지가 이들의 소외감을 메우는 힘이 된다면, 그것은 간접적인 국방의 길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란 어디 국군에게만 보내는 위문편지에 한하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보라.
주인꽁 「잔」은 처녀시절 연인으로부터 받은 무수한 연서들 고이 간직했다가 남편으로부딕 절망하게 될때,, 아들로부터 실망이 올 때마다 몰래 꺼내 보며 깊은 위안을 밤지 않았던가.
이렇듯 편지란 우리들의 가슴 속에 활성의 꿈을 키워주는 정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지쓰는일을 의민하고 외면하고 산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 1명이 한햇동안 쓰는 편지는 29통이란다. 미국 3백99통, 일본 1백31통, 서독 2백19통, 벨기에 3백41통, 프랑스 2백40통, 호주 1백69통, 싱가포르 76통, 대만 51통에 비해 우리는 너무 편지를 쓰지 않는다.
편지는 비록 그것이 서투른 문장으로 체계없이 적어 보낸 사연일지라도 보낸 이의 숨결이 살아 있어 깊은 감동을 준다. 웬만한 오해도 정성들여쓴 한통의 편지를 읽는 순간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것도 다 그런 생명감이 있어서다.
이런 성탄절이나 연말연시에는 오래 잊었던 사람, 찾아뵙지 못했던 분들께 실실이 엮은 사연을 한번쯤 띄우는 것도 좋으리라.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그 큰가방에 담고 오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생활도 윤기를 더하는 그런 기쁨을 맛보지 않겠는가.
▲충북 음성 출생 ▲서라별예술대학 졸업 ▲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옥적』 당선으로 문단 데뷔 ▲시집『실내악을 위한 주제』 ▲현 월간「한국문학」 취재부장·한국여류문학인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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