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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애연가 김정은, 스위스서 담배 제조기까지 수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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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왼쪽)이 담배를 피우며 잠수함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수행원들이 김 위원장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고 있다. 이 사진은 13일자 노동신문에 실렸다. [노동신문]

요즘 평양의 애연가들은 말그대로 ‘지상낙원’을 만났습니다. 최고지도자가 줄담배를 즐기고, 그 장면이 노동신문을 비롯한 관영매체에 연일 실리고 있어서입니다. 한때 북한을 휩쓴 금연 캠페인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집권한 뒤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습니다.

 TV에서 흡연 장면은 모조리 모자이크 되고, 담배값 인상에다 식당·공공장소에서의 금연까지 흡연자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우리완 딴판입니다.

 얼굴이 활짝 펴졌을 노동당 통일전선부 간부 B씨가 떠오릅니다. 과거 방북 취재 때 자주 만나곤 했던 그는 당의 금연지시 때문에 곤혹스러워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담배는 심장을 겨눈 총과 같다”며 금연 교시를 내린 상태였죠. “흡연자와 음치, 컴맹은 21세기의 3대 바보”라는 말도 했다는데요. 김정일은 2001년 중국 방문 때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고 선언했더랬습니다.

연신 담배를 피워대던 B씨에게 “장군님(김정일) 지시를 결사관철해야지, 왜 어기냐”고 농을 건네면 어쩔줄몰라하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좀 어려워”라고 토로하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준비해간 붉은색 말보로 한 보루를 선물로 건네면 “이 선생, 뭐 필요한 거 없나. 뭐든 얘기해보라우. 방조(도움)해줄테니”라고 반색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김정은은 골초 수준의 애연가입니다. 조선중앙TV에는 연신 담배를 문 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임신한 아내 이설주 옆에서도 흡연을 할 정도니 말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집무실은 물론 군부대 야외 훈련장까지 그가 가는 곳 어디든 크리스털 재털이와 담배가 준비되죠. 집권 초 김정은이 손에 든 담배를 삭제하는 등 흡연 장면 노출을 꺼리던 북한당국은 지난해 12월 노동신문 1면에서부터 적극 공개 쪽으로 돌아섰는데요. 탈북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60~70대 노간부를 세워놓은 채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드러내 권력 장악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하고 원숙한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말합니다.

김정은은 북한산 ‘7·27’ 브랜드를 즐겨왔는데요. 이른 바 전승절이라고 북한이 주장하는 휴전협정 체결일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탈북자들은 “그렇게 고급담배는 아니고 당 간부들이 즐겨피는 제품”이라고 귀띔합니다. 특이한 건 라이터가 아닌 성냥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최근엔 주목할만한 변화가 생겼는데요. 건강 이상으로 40일간 공개활동을 중단했다가 10월 중순 복귀한 김정은이 담배를 바꾼 겁니다. 지난달 25일 노동신문은 신천박물관을 찾은 김정은이 담배 피는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는데요. 필터부분이 녹색인게 포착돼 대북 정보 당국을 바짝 긴장케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가 만든다고해서 일부 네티즌사이에 화제가 됐던 ‘말보로 캐너비스’(Marlboro Cannabis)라는 제품일 가능성 때문인데요. 이 담배에는 마리화나 성분이 포함됐다고 합니다.

 관계당국은 김정은이 과거 스위스 조기유학 때 호기심 수준에서 이런 종류의 담배를 접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김정일의 요리사 출신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도 저서에서 “김정은이 10대 중반에 담배를 배웠다”고 밝혔죠. 올 상반기에만 스위스에서 담배 제조 관련 설비를 18만달러(우리 돈 1억9000만원)어치 수입한 것도 김정은의 기호에 맞는 담배를 맞춤생산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입니다.

북한은 성인 남자의 흡연률이 54.7%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세계 평균 48%에 비해 높고, 아시아권에선 중국·라오스 다음입니다. 체제의 특성상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다른 기호품이 많지않은 게 이유로 꼽히는데요. 한때 북한은 가짜담배 생산으로 막대한 달러를 챙겼습니다. 2006년 다국적 담배제조회사들이 낸 보고서에는 북한이 10~12개의 공장에서 매년 410억개의 말보로·마일드세븐 등의 위조품을 생산해 5억2000만~7억200만 달러의 불법수입을 거두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담겼습니다.

 김정은의 과도한 흡연을 통치 스트레스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핵·미사일을 놓고 미국 등과 벌이는 도박, 후견국 중국마저 달라진 기류 등 고립감 속에 경제난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 줄담배를 피우게 한다는 겁니다. 남북관계 경색과 유엔의 인권결의안 등으로 북한 최고지도자와 주민들의 흡연률은 앞으로도 줄어들기 어려워보입니다.

이영종 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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