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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 눈 깜짝할 새 옷이 마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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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땀을 냉감에너지로 쓰는 섬유 ‘아이스필’, 반대로 발열에너지로 쓰는 신소재 ‘메가히트’, 오리털을 대체할 수 있는 광발열 충전재 ‘쏠라볼’ 등을 개발한 벤텍스 고경찬 대표가 제품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2005년 봄, 일본 오사카에 있는 미쓰비시상사 섬유부문의 접견실. 원단 수입을 담당하는 책임자급 직원이 나타나자 고경찬(54) 벤텍스 대표는 예의를 갖추고 허리를 숙인 뒤 짧게 말을 건넸다. “긴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 딱 1분만 설명하고 나가겠습니다”

 이미 이토추·마루베니 등 다른 일본 종합상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던 직원은 측은한 마음에 고 대표를 임원 회의실로 데려갔다. 고 대표는 임원들을 만나자 가방 속에서 섬유원단을 꺼낸 뒤 물을 부었다. 물은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습기에 반응하는 감지기를 원단에 가져다 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에 닿은 원단이 순식간에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깜짝’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있던 임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고 대표는 “당초 짧게 끝내려던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1시간 이상으로 늘어났다”며 “우리 제품과 비교를 위해 가져온 경쟁사 제품에선 40분이 지나도 물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이 제품은 고 대표가 개발한 ‘1초 만에 마르는 섬유’, 이른바 ‘드라이존’이다.

 오사카에서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미쓰비시 직원들이 서울 잠실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미쓰비시는 벤텍스에 투자를 결정하고, 일본 내 독점 판매계약을 체결했다. 현재 벤텍스는 미쓰비시뿐만 아니라 펄이즈미·에디바우어·노스페이스 등 세계 스포츠의류 업계의 거인들을 거래처로 두고 있다. 국내 원단 업체로는 처음으로 나이키의 기술 개발 파트너로 등록돼 있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벤텍스로부터 차별화한 고기능 섬유원단을 공급받고 있다.

벤텍스 고경찬 대표가 개발한 1초 만에 마르는 섬유 ‘드라이존’. 원단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물을 부으면 물이 바로 빠져나가면서 1초 만에 마른다(위쪽 사진). 반대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부으면 물은 스며들지 않는다(아래쪽 사진). 벤텍스는 세계 주요 스포츠 의류업체에 이 원단을 공급한다. [김경빈 기자]

 제품 아이디어는 우연한 순간에 찾아왔다. 평소처럼 운동을 하다 땀 때문에 옷이 달라붙자 ‘땀을 바로 옷 밖으로 배출하고 금방 마르게할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비가 옷안으로 젖어들지 않게 하는 방법도 궁리했다. 3년여 연구 끝에 물을 밀어내는 원사와 물을 빨아들이는 원사를 3차원 입체 구조로 설계한 뒤 특수가공 기술을 접목시켜 드라이존 개발에 성공했다.

 고 대표는 “섬유산업을 모두가 사양산업이라고 하지만 핵심 기술을 확보한다면 얼마든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며 “그 결과 우리는 협력사나 계열사가 아닌 세계적인 스포츠 의류업체 본사와 직접 협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 군대에서 휴가를 받으면 집에 부담이 될까 서울 용산 ‘용사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부대로 복귀한 적도 있다. 대학 등록금도 스스로 벌어야했다. 그래서 방학 때면 부산에서 등짐을 매고 행상을 했다. ‘초짜’ 행상이었지만 수완은 좋았다. 여름이면 그는 부산 주요 시장을 돌아다니며 ‘간이 샤워기’를 팔았다. 수도꼭지에 연결해서 쓰는 즉석 샤워기다. 한여름 땀에 흥건히 젖은 상인들의 주문이 쏟아졌다. 고 대표는 “80년대 중반 대학 등록금이 40만원 정도였는데, 하루에 10만원 이상을 벌기도 했다”며 “고객이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살피는 게 장사의 기본이란 것을 그때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학 졸업 후 코오롱에 입사해 신소재 개발 등을 담당하던 그는 1999년 서울 도곡동에서 직원 한 명과 함께 벤텍스를 세우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창업 이후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연구개발(R&D)이다. 직원의 4분의 1 가량을 R&D 인력으로 둘만큼 공격적으로 투자한 덕분에 벤텍스가 보유한 특허는 70건이 넘는다. 이를 기반으로 해마다 신소재를 개발해 발표회를 연다.

 벤텍스가 개발한 ‘아이스필’은 땀이 나면 체온을 내리는 기능을 갖춘 소재다. 반대로 ‘메가히트’는 땀을 발열 에너지로 전환시켜 열을 낸다. 옷의 한쪽 면은 햇빛을 받으면 따뜻해지고, 반대쪽은 햇빛을 반사시켜 시원해지는 ‘리버서블 재킷’도 선보였다. 옷을 바로 입으면 온도가 올라가고 뒤집어서 입으면 온도가 내려가는 식이다. 이밖에 오리털을 대체할 수 있는 광발열 충전재, 땀이 났을 때 스스로 형태를 바꿔 최적의 착용감을 주는 섬유, 자외선이나 체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섬유 등을 상용화했다. 최근에는 보습·미백 효과는 물론 자외선 차단 효과를 갖춘 스포츠 마스크팩, 아토피 완화 등의 효과를 내는 바이오 섬유도 개발했다. 그간 쌓아온 섬유개발 노하우를 의류 이외의 다양한 제품에 접목해 섬유산업의 경계를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제품 개발은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나왔다. 그는 성균관대 공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기소재공학이 그의 전공이다. 2012년부터는 중앙대 융합의약과학과 박사과정에서 피부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바이오와 섬유를 접목한 소재를 개발하면서 직접 관련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 신섬유 소재의 적용 분야를 화장품·헬스케어·농업·건축 분야로 넓힐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직원수가 5명이 되지 않던 회사는 이제 50여 명의 우수 인력을 확보해 연매출 300억원을 올리는 ‘강소기업’으로 컸다. ‘동탑사업훈장’·‘장영실상’·‘신지식인상’·‘대통령 표창’ 등 수많은 상과 표창을 받았고, 일부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는 그의 기업운영 전략이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다뤄지기도 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중소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세(謀勢)·차세(借勢)·용세(用勢) 전략’을 구사할 것을 주문했다. 손자병법 5편에 나오는 병세편을 접목시킨 그만의 경영철학이다. 우선 R&D를 통해 핵심 기술력을 갖추고(모세), 글로벌 기업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한 뒤(차세), 이를 네트워크로 활용해 글로벌 시장으로 진입하라(용세)는 것이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직원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한다. 그는 장거리 해외출장 때에도 이코노미석을 탈 정도로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는 자신이 가진 주식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등 직원들에게는 화통하다. 성과를 낸 직원에게는 푸짐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벤텍스에서는 팀장급 가운데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섬유산업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고 대표는 각 대학에서 ‘섬유공학과’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섬유공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섬유산업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산업”이라며 “특히 정보기술(IT)과 결합한다면 한국을 이끄는 미래산업으로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손해용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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