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술신용대출 6조 근접 … 넉 달 새 30배 늘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지난해 9월 창업한 에너엔비텍은 반도체 공정 중에 발생하는 폐기물를 농축·정제하는 기술 특허를 갖고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한 기술이지만 담보가 없어 시설비 마련부터 쉽지 않았다. 여러차례 시중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그러던 이 회사는 최근 신한은행에서 시설자금 13억원을 대출받았다. 기술보증기금의 보증서와 은행의 현장평가를 통해 이 회사 기술의 가능성이 높게 평가됐기 때문이다. 시설자금에 더해 5억원의 운영자금도 대출됐다. 이 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대기업과의 계약을 따내면서 연간 15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A게임회사는 5년 간 롤플레잉 게임(RPG)을 개발해 지난해 창업했다. 사업을 확장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돈이 문제였다. 매출이 거의 없어 대출을 받기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하나은행을 통해 담보 없이 9억원을 대출받았다. 이 은행은 또 창업기업을 위한 ‘스타트업 펀드’를 통해 20억원을 투자했다. 과거 이 기업의 재무 상태로는 시중은행 대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은행 관계자는 “게임회사와 박람회 현장을 직접 찾아 게임들을 봤고, 일반 롤플레잉 게임과 달라 중국 시장에서 잘 팔릴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올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술금융이 탄력을 받고 있다. 기술평가서에 기반한 대출이 4개월 사이 30배 넘게 늘었다. 정책금융 지원이 아닌 은행이 자율적으로 집행한 대출도 4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기술금융 실적의 증가세가 가파른 만큼 기술 평가의 질 관리와 대출 부실화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8일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기술신용대출은 5조8848억원(누적)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술보증기금·한국기업데이터·나이스평가정보와 같은 기술신용평가기관(TCB)의 기술평가를 받아 이뤄진 대출이다. 금융위원회와 은행연은 지난 7월부터 기술금융 실적을 집계해 공개하고 있다. 7월 말 1922억원에서 30배 이상 늘었다.

 은행별로는 신한은행의 기술금융 지원 실적이 1조278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실적 집계가 시작된 이후 1위는 줄곳 IBK기업은행이었다. 국책은행인 만큼 정부의 기술금융 활성화에 앞장섰지만 시중은행들이 은행 자체 평가에 기반한 대출을 늘리면서 역전된 것이다. 우리은행은 10월 말 6073억원에서 11월 말 9761억원으로 늘었다. 하나은행도 10월 말 5929억원에서 기술금융지원 규모가 8042억원으로 증가했다. 국민은행은 한 달 사이 두 배 넘게 늘어 4759억원을 지원했다.

 기술보증기금의 보증부 대출과 정책금융공사가 민간기관에 위탁하는 간접대출(온렌딩)을 제외한 은행 자율대출도 크게 늘고 있다. 10월 말 1조9583억원에서 지난달 말에 3조8475억원으로 한 달 사이 두 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신한은행은 84%, 하나은행은 79%, 우리은행은 61%가 TCB에 기반한 은행 자율 대출이다. 반면 전체 실적 기준 2위인 기업은행은 은행 자율 대출 기준으로는 4위(4831억원, 39%)에 해당한다.

 시중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는 실적공개·평가라는 금융당국의 압박도 있지만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차원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은행 자체 상품으로 1년 반 전부터 기술금융 상품을 출시해 관리해왔다”며 “기술평가서를 근거로 대출을 하게 되면서 현장에서 기술금융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기존 심사역들은 재무 중심으로 봤는데 기술평가서에는 기술정보와 재무에 미치는 영향까지 담겨 있어 부실률을 오히려 줄일 수 있게 됐다”고 평했다.

 그러나 기술평가의 신뢰도가 들쭉날쭉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는 기술을 평가하는 기관이 기술보증기금·한국기업데이터·나이스평가정보 3곳에 불과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보는 보통 등급은 별로 없고 낮은 등급을 세분화하는 반면 나이스는 높은 등급을 세분화하는 경향이 있다”며 “어느 기관에 신청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공공연구기관, 특허·회계법인 등이 기술평가기관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신용정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라며 “평가기관들을 늘려가면 경쟁을 통해 평가 수준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은행 자체 인력의 전문성 강화도 과제다. 기술에 기반한 대출은 현장 평가가 중요한데다 기술평가서를 받아오더라도 이를 제대로 해석할 줄 아는 인력이 내부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한·우리 등 시중은행들은 전담팀을 구성하고 변리사와 산업전문가 채용에 나서며 장기적인 인력확충과 교육 계획을 세우고 있는 단계다. 현재로선 심사 능력이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1조원이 넘는 가공 수출실적을 바탕으로 무역보험공사와 은행들을 농락한 모뉴엘 사태도 이런 환경에서 비롯됐다.

 김경환 성균관대학교 글로벌창업대학원 교수는 “기술금융은 본래 리스크를 안고 할 수밖에 없다”며 “창업 초기 기업은 기술력 위주로 볼 수밖에 없지만 창업한지 3년 이상이 된 기업들은 재무적 능력과 마케팅 능력, 조직 등을 은행이 현장 방문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해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이 자체적인 모형개발을 통해 돈이 되는 기술을 가진 회사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며 “기술정보가 시중은행 등에도 공개되는 만큼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정보를 보호하는 것도 과제”라고 지적했다.

박유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