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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베트남전 외교문서 공개] 박정희 "독도문제 융통성 절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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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6일 외교부의 문서 공개로 13년8개월간에 걸친 한.일협정 협상의 전모가 최초로 드러났다. 협상은 1951년 시작돼 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의 서명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은 처음부터 힘든 입장이었다.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국(전승국)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서는 이후 한국이 일본과 대립하며 고비와 좌절을 거치다 결국 미완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 끝없는 대립=한.일은 51년 10월 본회담을 위한 첫 예비회담부터 청구권에서 재일동포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안에서 대립했다. 52년 2월 1차 회담에서 한국이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 항'으로 청구권을 요구하자 일본은 곧바로 '역(逆)청구권'을 제기했다. '일본이 한국을 개발했으니 받을 돈이 있다'는 논리였다. 재일동포 영주권 부여를 요구하자 일본은 재일 한국인 강제 퇴거 조치 확대로 압박했다. 53년 4~7월 2차 회담에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런 일본의 태도는 패전국.침략국이 아닌 시혜국이었다.

◆ 박정희의 대일 외교=협상은 61년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며 본격화됐다. 그해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일에 이어 다음해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간의 '김-오히라 메모'로 청구권 문제가 일단락돼 한.일협정의 기초가 마련됐다. 그러나 박 정권은 독도.청구권 액수 등에선 분명했다. 박 의장은 62월 11월 8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령을 보내 "청구권을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하면 회담 현안이 아님을 지적하라"고 지시했다. 한 달 전인 10월 17일엔 "혁명정부라도 '6억 달러'이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훈령을 내렸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 서명을 코앞에 둔 65년 6월엔 주일대사에게 긴급 공문을 보내 "독도 문제에선 조금도 융통성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시했다. 박정희 본인은 61년 이케다 일본 총리와 통역 없이 회담하며 "일본 측이 (청구권 요구에 대해) 5000만 달러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농림.국방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구권 문제에 매달려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 유지'입장을 포기했다. 어업협력금 명목의 9000만 달러 차관을 받고 12마일 전관수역이라는 일본 안을 수용했다.

◆ 미완의 외교인가=한.일협정은 일제시대 조약을 '원천 무효화'하지 못했다. 지금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계속된다. 협정에 '청구권 문제 해결'을 명시, 종군위안부.강제 징용자.원폭 피해자 등에 대한 개인 배상권도 못 얻어냈다. 이 때문에 한.일협정이 '빈곤 탈출.국가 재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권의 철저하지 못한 과거사 정리'란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그럼에도 그간 관련자들의 회고나 단편적 기록으로 알려졌던 협상 전모가 공식 문서를 통해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굴욕외교''독도를 팔아 청구권 자금을 받았다'등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근거가 생긴 것이다. 외교부 문서공개심사반으로 참여했던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나도 한때 굴욕회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록을 보니 정부가 국익을 위해 비교적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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