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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포기" 결단만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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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음주에 6자회담 4차회의가 속개될 전망이다. 회담이 재개되는 것 자체가 외교적인 해결의 발판 다지기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번에는 원칙적 선언과 같은 구체적 성과가 필요하다. 15년여 이상 계속된 북핵 위기 국면을 종식시키기 위한 북한의 '전략적 결단'이 가시적 형태로 나타나기를 절실히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 정세가 1990년대 초반과는 크게 변화했다. 북한이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부시 정권의 대북 강경정책이 눈앞에 버티고 있으니, 북한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해도 자신의 안전보장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 정세가 형성돼 있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90년대 초 북한은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89년 동구혁명의 물결이 밀려오는 가운데, 소련은 북한을 버리고 한국과 국교를 맺었으며, 그 소련마저 붕괴됐다. 신생 러시아의 옐친 정권은 북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의 중국은 자신의 체제 유지에 급급해 북한을 감싸거나 지원할 생각은 있어도 능력이 뒤따르지 못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을 압박해 한국 주도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김일성 주석 사후에는 '흡수 통일'이 현실적 과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이 관심을 보인 대미.대일 관계정상화도 한국의 반대와 미.일의 소극적 관심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결정적 약세에 몰린 북한에 핵 개발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합리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까지의 6자회담 과정에서도 보이듯이 지금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 등 역내의 주요 관계국들 사이에는 '현상유지'에 대한 합의구도가 형성돼 있다. 각기 여러 가지 동기와 이해관계가 배경에 있지만 북한체제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를 통한 점진적 변화에 일정한 컨센서스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과 일본 내에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선호하는 견해와 세력이 있지만 미국과 일본에도 대국적으로는 현상유지가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와 합치된다. 다시 말해 북한이 핵개발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안전보장과,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현 체제의 존속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대북 유화정책과 경제적 지원이 북한의 비타협적인 벼랑 끝 전략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다. 한국과 중국과 같은 온건정책이 있기 때문에 북한은 미국의 강경 방침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타결을 시도할 '안심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핵 포기를 통해 잃는 것은 사실상 없고, 얻는 것이 매우 큰 것이 현재 상황이다.

북한도 이 같은 인식을 가지면서 핵 포기의 '전략적 결단'쪽으로 서서히 기우는 것 같다. 다만 북한 내부에는 아직 망설임과 강경론이 있어 불투명한 움직임도 자주 보인다. 북한 내부의 합리적 상황판단이 보다 큰 흐름이 되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 특히 한국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다.

북핵 문제는 단순히 한반도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향후 전개를 좌우하는 중요한 갈림길이다. 다소 단순화하자면 앞으로 지역협조형의 질서가 실현되는지, 아니면 '신냉전'과 같은 지역대립형의 질서로 곤두박질치는지의 분기점을 맞고 있다.

반세기 전 북한이 '민족해방'을 내세우며 시작한 한국전쟁이 일본의 재무장과 미.중 대결의 냉전구도를 확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제2의 한반도 위기는 또다시 새로운 차원의 일본의 군사화와 미.중 대립의 '신냉전'를 초래하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 미.일동맹의 강화와 미사일 방위, 유사법제와 헌법개정 논의 등 급물살을 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추세도 '북한 위협론'이 없이는 국내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 위협론이 특정한 의도 아래 과장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제는 한반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지역 전체가 어떻게 형성해 가는가를 감안한 큰 틀의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