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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주군관학교 한인생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강문봉장군이 44년 일본육사본과(59기) 에 편입되어 나와 동기가 되면서 들려준 얘기지만 그가 군인이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서 수석졸업하는 광경을 뉴스영화에서 보고 나서였다 한다.
강장군은 만주 신경 제l중학 4학년 때 단체로 영화관람을 갔었다. 그때도 영화개시 전에 뉴스를 상영했는데 그날은 마침 군관학교 졸업식 광경이 나왔다.
사회를 맡은 일본인 장교가『황제폐하의 상을 받게된 영광의 수석졸업생 박정희생도』라고 호명하자 박정희생도가 다부지고 침착한 모습으로 나와 상을 받는 장면이었다.
정일권장군(봉천5기)이나 박림항장군(만주1기)의 수석 때도 그랬지만 박정희전대통령의 수석 때도 전례대로 일본의 세력권 안에 있던 모든 나라의 신문들에는 군관학교 수석졸업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정일권장군의 존재는 만주에 있는 모든 군인과 조선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봉천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수석을 했고 일본인장교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만주고등군사학교를 나와 만주군총사령부의 고급부관으로 근무할 때 그는 화려한 견장에 말을 타고 출근했다. 그 때 계급은 대위.
이 같은 견장이나 승마 출퇴근은 고등군사학교 출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였다. 고등군사학교란 일본의 육군대학과 같은 격의 현역장교 교육기관인데 그곳을 거치면 중장까지의 진급은 보장되는것이 관례였다.
한인으로는 일본에서 이근·홍사익두분이 일본육대를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고 만주에서는 정일권장군만이 그 과정을 거쳤다.「「장군이 고등군사학교에 들어갈 때는 각 부대에서 추천받아 응시한 5족출신의 엘리트 장교4백여 명이 몰려왔으나 모집정원은 20명이었다.
정장군이 일본육사 55기에 편입, 거기서 유재흥장군과 알게된 후 두 분의 사이는 각별히 친한 사이가 됐다.
정장군은 일본육사에서도 수석을 하여 만주편입 수석생에게 주는 일본군부대선의 군도를 상으로 받았다.
정장군은 이 군도를 집에다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교들은 정장군 집에 왔다가 이 칼을 보고는 그 칼에 정중히 거수경례를 했다는 것이다. 이 군도는 8·15후 만주에서 소련군의 가택 수색을 받았을 때 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만주군관학교가 개교한 이래 1기에서는 박림항, 2기에서는 박정희생도 등 한인계가 수석을 했고 3기수석은 중국인에게 삐앗겼으나 4기수석은 장은산(군영·만주군중위·작고), 5기는 강문봉생도가 차지함으로써 다시 한인계로 돌아왔다.
이같이 우리청년들이 계속 수석을 차지하고 나머지 한인계도 좋은 성적을 올리자 만주군관학교 당국은 한인계에 대한 처우문제를 재고하게 됐다.
만주군관학교는 편성에서부터 일본인 위주였다. 일본인들은 따로 군대를 편성했고 나머지 오·만·옹·한인계를 한데 묶어버렸었다. 그러다가 5기에 이르러 강문봉장군이 수석입학하고 재학성적도 계속 수석을 차지하자 한인들을 일본인과 같이 일계에 편성했다고 한다.
조선인을 중국계에 편성해 놓으면 조선인은 사기가 떨어지고 중국계(한인·만주인·몽고인)는 열등감을 느끼게되어 5족협화에 유해하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5기생으로 들어간 5명전원이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사에 편입됐다.
어떻든 만주에는 우리 동포가 많았고 여러 분야에서 조선인들이 두각을 나타내어 그 지위가 다른 지역에서보다는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만주 안에서의 각종 경연대회에서는 조선인이 우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끝내는 조선인들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까지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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