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일 갈등 아닌 올바른 교육 위한 문제라고 의회 설득”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 7월 1일은 미국의 한인 교포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버지니아주 공립학교의 모든 교과서에 일본해와 함께 동해를 표기해야 한다는 ‘동해병기법’이 발효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동해병기를 법으로 정한 곳은 버지니아주가 처음이다. 5월 말에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위안부 기림비가 건립됐다. 이를 주도했던 마크 킴(48)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을 지난달 27일 만났다. 그는 주의회에서 유일한 한국계로 3선 의원이다.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우여곡절 끝에 2년 만에 동해병기법이 발효됐는데.

“이 법이 주의회에 처음 상정된 때는 2012년이었다. 당시에는 상원에서 좌절됐다. 의회를 설득하는 작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법안을 재상정할 때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일단 의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한인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벌였다. 결국 지난 3월 초 의회를 통과한 법안이 테리 매콜리프 주지사에게 넘어갔고 그가 서명함으로써 법안이 효력을 갖게 됐다”

-어떤 논리로 의원들을 설득했나.

“당초 동료 의원들은 동해병기를 국제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동해병기를 결정할 경우 다른 유사한 사안들도 모두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부담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의혹 등이다. 이에 따라 초점을 교육에 맞췄다. ‘버지니아주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한ㆍ일간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지 않았다. 한국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동해병기를 한다고 해서 한국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논란이 된 이 문제를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정확히 교육하느냐’에 초점을 맞춰 의원들을 설득했다. 감성적인 호소도 했다.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한인 노인들은 아직도 일제 식민통치를 기억하고 있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미국에 온 이들에게 과거의 고통을 계속 기억하도록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결국 의회 분위기는 동해병기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정부의 반대 로비가 만만치 않았는데.

“사실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주민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방해 공작을 했다.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일본 대사는 일본 기업들의 투자를 들먹이며 주지사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버지니아주 입장에서 일본은 5번째 무역 파트너다. 한국은 13번째로 교역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이 때문에 주지사의 고민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의회에선 ‘이런 일로 일본 정부가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버지니아주를 깔보는 것’이라며 오히려 반발했다. 일본의 로비가 오히려 의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한인사회의 일부 인사들로 인해 오해를 살 뻔한 적이 있다. 특히 일부 이민 1세들은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했다. 의회에서 태극기를 펼치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미 의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동해병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미국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지난 5월에는 버지니아주에 위안부 기림비도 건립됐는데.

“현재 뉴저지주 등 미국에 건립된 위안부 기림비와 소녀상은 모두 11개다. 버지니아주 기림비는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 청사 내 잔디공원인 ‘피스 메모리얼 가든’ 에 있다. 지난해부터 워싱턴의 여성단체와 함께 주도했으며 사업 초기에 일본 기자들이 소문을 듣고 취재를 시작했다.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될 경우 기림비 건립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해 은밀하게 추진했다. 다행히 주의회에서 동해병기 문제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기림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사업이 승인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기림비 건립을 공개해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동해병기법과 위안부 기림비를 반대하는 일본 측 인사들이 보낸 협박 메일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됐는데.

“4세 때 군목인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이후 호주에 살다가, 14세 때 미국에 정착했다. 나는 미국의 정치인이지만 항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살아왔다. 유세를 할 때도 ‘동양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강조했다. 선거 참모들은 백인이 80%에 달하는 내 지역구에서 다수를 대변해야 당선에 유리하다고 조언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백인들에게 ‘당신들이 자유와 풍요를 찾아 미국에 왔듯이 나도 마찬가지이며 미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서는 동양인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백인들도 내 말에 공감을 했고, 동양인이 11%밖에 되지 않는 지역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향후 연방의회 등 큰 무대에 나설 생각은.

“버지니아주는 내 소속당인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이다. 현재로선 주의원에 만족한다. 연방의회에 진출하려면 같은 당 동료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무리수를 두고 싶지는 않다. 정치를 시작한 지 30년이 됐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부터 대통령 선거 유세에 참여했다. 정치인으로서 아직 시간이 많은 만큼 훗날을 기약하고 싶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