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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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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보조에서 정식으로 기계를 내가 맡게 되었는데 이게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렌즈를 붙인 목형을 빙빙 돌아가는 틀에다 끼우면 자연스럽게 아래의 볼록한 틀이 돌아가면서 연마를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울어지거나 맞지 않으면 금방 유리가 깨어져 나갔다. 파손 처리된 렌즈는 당연히 일당에서 배상하도록 했다. 목형을 틀에다 차례로 끝까지 끼우고 나서 맨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을 빼어 두고 다시 빈자리를 차례로 채워 가면서 처음 자리에다 새것을 끼우는데 한시라도 빈틈이 있을 수가 없었다. 기계는 사정없이 돌아가는데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렌즈가 깨어져 나간다. 연마 틀에는 고운 분말로 된 연마제를 넣어 주어야 하고 끊임없이 물속에 담갔다가 빼어 자리를 바꿔주는데 오후가 되면 불어터진 손가락들이 아리고 쓰라렸다. 이렇게 똑같은 단조로운 작업을 열두 시간씩 해내고들 있었다. 연근이나 야근이 없다고 하면 나는 속으로 환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들은 에이, 하면서 실망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큼 일당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는 공단을 오가면서 선술집이나 포장마차에서 가끔 고참 공원들에게 그동안 쟁의 같은 것이 없었나 묻고는 했다. 이름이 알려진 어느 의류 봉제공장에서 큰 쟁의가 있었다. 그들은 작업장을 폐쇄하고 버티다가 쫓겨나자 인근 야산으로 올라가 농성을 하다가 이틀 만에 진압되었다. 전자공장 또는 식품공장에서도 산발적으로 쟁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뻔히 내다보이는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이 쟁의 중인데도 구경만 하거나 점심시간에는 태연히 배구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내가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공원이라서 소곤소곤 해주는 얘기들이었다.

그 회사에서 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잊었으니 그의 별명대로 마도로스라고 부르자. 전에는 본사에서 일하다가 무슨 사고를 저질러서 쫓겨왔다는데 목형에 렌즈를 붙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이 수월하리라 여기고는 그의 작업을 부러워했더니 그게 바로 숙련공의 일감이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지런하고 둥글게 목형에 렌즈를 붙이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였다. 그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그는 해군 출신이라서 늘 배를 타던 얘기만 했다. 나하고는 군대로 치면 사촌 간이라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그만큼 많았다. 어느 날 모처럼 야근이 없어서 그를 따라 숙소까지 놀러갔다. 그는 구로동 시장 부근의 벌집 동네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기다란 일자집 안에 가운데 비좁은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단칸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방마다 작은 열쇠가 걸려 있고 방 앞에는 아궁이 하나와 신발을 벗을 비좁은 공간이 있었다. 통로는 연탄가스 냄새가 가득 차 있고 방을 열고 들어가면 천장에 플라스틱을 슬레이트 사이에 끼워 얹어 채광을 했다. 다행히 창이 있는 방이라 해도 바깥이 바로 골목길이라 도둑이 무서워서 창문에 꼭 걸쇠를 걸어놓았다. 방 안에는 식기 나부랭이와 작은 나무찬장이 하나씩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밥도 짓고 반찬도 했는데 그래도 그 친구는 석유곤로가 있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취사를 했다. 석유 그을음 냄새가 고약했지만 그래도 통로의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서 취사를 하지 않는 게 다행스러운 노릇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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