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크기 280㎜ … 한국서는 남자용 신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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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투어에서 5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허미정은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어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왕발(280㎜)의 소유자인 그는 발에 맞는 하이힐을 구하기 어려워 맨발로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고성진]

“만약 퀄리파잉스쿨에 또다시 가야 한다면 차라리 골프를 그만 둘래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허미정(25)은 지난 6월 아버지 허관무씨(60)에게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LPGA투어에서 6년째를 맞은 허미정은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2009년 세이프웨이 클래식에서 우승한 뒤 스윙 교정을 했다가 깊은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다. 올시즌 10개 대회에서 컷 통과는 딱 두 번. 상금랭킹은 150위권까지 밀려나 자력으로 나갈 수 있는 대회가 거의 없었다. 오랜 슬럼프를 겪은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허미정은 “2007년 미국에 처음 왔을 때도 스폰서 없이 어렵게 퀄리파잉스쿨을 치렀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까지 겹치면서 실력 발휘를 못했고 결국 떨어져서 2부 투어에 가야했다. 그 때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만약 퀄리파잉스쿨에 가야한다면 차라리 골프를 그만두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8월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9위에 올라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 출전권을 얻었고, 에비앙 챔피언십 3위로 남은 시즌 모든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상승세를 탄 그는 바로 다음 대회인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에서 5년 만에 우승했다.

 2014년 시즌을 마치고 귀국한 허미정을 5일 만났다. 허미정은 “결국은 자신감이 문제였다.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톱10안에 든 뒤 감이 돌아왔다”며 “내 스윙을 찾겠다는 목표를 달성했고, 우승까지 했다. 올시즌 성적에 점수를 매기자면 10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5년 만에 2승 째를 거둔 허미정은 요즘 바쁘신 몸이 됐다. 시즌이 끝났는데도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허미정은 “서울과 대전 집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오간다. 그렇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서글펐던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허미정은 LPGA투어에서도 키카 큰 편에 속한다. 신장 1m76㎝인 허미정은 골프 선수로서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체 조건이 뛰어나다. 키도 크지만 팔과 다리가 유난히 길다. 발크기는 280㎜나 된다. 그러나 너무 긴 팔, 다리가 오히려 컴플렉스라고 했다.

 허미정은 “팔이 긴 덕분에 스윙 아크도 큰 편이다. 긴 팔이 장타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맞는 옷과 신발을 찾기가 힘들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 신발을 주로 신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옷과 신발 걱정을 할 일이 없어졌다. 우승하기 전까지는 스폰서가 없어서 옷과 모자를 사입는 처지였지만 최근에는 “우리 옷 좀 입어달라”는 골프의류 업체의 요청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든든한 후원사도 만날 것으로 보인다. 허미정은 “후원 기업의 로고를 모자에 다는 것은 선수의 자존심이다. 든든한 후원사가 생겨 기쁘다. 내년 시즌이 벌써 기대된다”고 했다.

 허미정은 12월 말 미국으로 출국해 내년 시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허미정은 “아무리 과정이 힘들더라도 노력은 꼭 보상받는다는 것을 슬럼프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지금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박)인비 언니다. 인비 언니처럼 올해의 선수상을 받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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