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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5조 탄소섬유 시장 한국도 팔 걷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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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011년 3월 정보기술(IT) 업계에 소문 하나가 돌았다. 애플이 미국 필라델피아의 자전거 회사 케스트렐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케빈 케니를 영입했다는 것이었다. 케스트렐은 자전거업계에선 처음으로 1986년부터 탄소섬유로 자전거 프레임을 만든 회사였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애플은 그에게 수석 엔지니어라는 자리를 제공했다. 얼마 뒤 애플은 세계 탄소섬유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에서 ‘탄소섬유 관련 구인공고’를 냈다. 애플 매니어들은 탄소섬유로 만든 아이폰의 출현 가능성에 환호했다. 이듬해 애플은 탄소섬유 아이폰은 아니지만 탄소섬유로 만든 금형의 특허 취득 소식을 시장에 알렸다.

탄소섬유 만드는 중간재 기술 상당 수준

 탄소섬유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무게는 철의 4분의 1, 강도는 철의 10배에 달해 철을 대체할 ‘꿈의 소재’로 불리는 게 바로 탄소섬유다. 특히 일본의 도레이가 최근 보잉과 1조 엔(약 9조3400억원)에 달하는 탄소섬유 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 이 시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일본은 항공기 시장을 선점했는데 한국은 어떨까. 결론은 “아직까진 해볼 만하다”이다. 연간 2000t의 탄소섬유를 생산하고 있는 효성 전주공장의 공장장인 방윤혁(50) 상무와 울산공장에서 1500t을 생산 중인 태광산업 신사업본부의 이인수(52) 상무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 요인을 짚었다.

 
 방윤혁 상무는 탄소섬유로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학위를 땄지만 탄소섬유 프로젝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효성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은 일본을 쫓아 탄소섬유 개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들은 당장 ‘미래’가 보이지 않는 탄소섬유 개발을 접기 시작했다. 박사 과정까지 공부한 ‘투자’는 6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타이어보강재를 연구하던 그에게 ‘팀’을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은 2007년이었다. 방 상무는 부랴부랴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4년을 꼬박 연구에 매달려 2011년 효성은 처음으로 탄소섬유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도레이가 70년대부터 탄소섬유 개발에 나선 것과 비교하면 무려 40여 년이 뒤처진 셈이었다. 효성은 탄소섬유를 육성하기 위해 2020년까지 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탄소섬유 자전거.

 2012년 3월 탄소섬유의 첫 생산을 알린 것은 태광산업이었다. 섬유사업으로 성장한 태광산업은 효성보다 다소 앞선 2009년에 기술 개발을 마치고 연간 1500t 규모의 섬유 생산에 들어갔다. 이 상무는 “한국 기업들은 섬유사업에서 잔뼈가 굵어 탄소섬유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통상 탄소섬유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가장 많이 쓰이는 탄소섬유는 석유화학제품인 프로필렌에서 추출한 ‘아크릴로니트릴’로 만들어진다. 이 원료를 가지고 1000도 이상의 고온처리를 해 ‘탄화’ 시킨 후 중간 소재인 ‘프리프레그’를 만든다. 다시 이 소재를 틀에 넣어 압력과 열을 가해 원사나 구조물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탄소섬유’다. 이 상무는 “탄소섬유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 아크릴 섬유 생산 기술이기 때문에 태광은 이미 원료부터 중간재, 최종 원사에 이르는 모든 공정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탄소섬유를 만드는 데 필요한 중간재 시장에선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SK케미칼은 80년대부터 이 중간재 사업에 뛰어들어 2012년에는 일본의 미쓰비시레이온과 협약을 맺고 탄소섬유 사업을 벌이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울산과 중국의 청도 공장에서 중간재를 생산하고 있으며, 특히 스포츠 레저 용품 시장에서는 아시아 시장 점유율이 2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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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섬유 3D 프린터.

외국기업 진입 못하는 방위산업용만 살아

 “낚싯대·골프채·우산대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직 탄소섬유를 팔 만한 국내 시장이 없습니다.”

 방 상무와 이 상무는 우리 기업들의 최대 약점으로 ‘국내 시장’을 꼽았다. 어렵사리 기술을 개발해 2년 전부터 생산을 시작했지만 국내엔 팔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재단법인 전북테크노파크에 따르면 세계 탄소섬유 시장은 2020년께 5조3200억원 규모로, 복합재(탄소섬유와 다른 소재를 결합) 시장을 포함하면 53조2000억원 육박하는 수준으로 연평균 20%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선 이미 도레이가 우주항공 시장을 필두로 2013년 기준 연간 1만8900t을 생산하며 앞서고 있고, 토호테낙스가 2위(1만3900t)에 올라 있다. 3위인 미쓰비시레이온(1만850t)까지 생산량을 합치면 전세계 시장의 89%에 달하는 물량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효성과 태광의 생산물량은 연간 3500t 규모에 그쳐있다.

 이 상무는 “국내엔 외국 기업들이 들어올 수 없는 방위산업용 시장만 겨우 살아있는 상태”라고 했다. 탄소섬유는 인공위성 뿐만 아니라 미사일과 같은 무기에 쓰이기 때문에 ‘전략물자’로 관리가 된다. 외국기업들이 국내에 공급하기엔 장벽이 있어 이 시장만이 유일하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 상무는 “항공기 시장은 이미 도레이가 선점해 우리 기업들이 뛰어들 여지는 없지만 자동차는 다르다”고 말했다. 항공기 시장에 들어가는 탄소섬유는 가볍고 강도가 더 세야 하는 ‘기능성’이 요구되는 반면, 자동차 시장에 들어가는 탄소섬유는 우리 기업의 기술수준으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와 같은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국내에 있는 만큼 협업을 통해 아직 개화하지 않는 자동차용 탄소시장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중 자유무역협정(FTA)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골프채와 같은 스포츠·레저 용품 시장에서 수요가 많아 무관세 효과를 누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 상무는 “세계 1위에 오른 한국 조선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탄소섬유 시장을 조선 시장으로도 넓힐 여지가 충분하다”며 “이밖에도 플랜트 건설자재 등으로도 활용도가 높아 기술 경쟁력이 있는 국내 기업들과 협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도레이는 최근 북미 시장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북미의 셰일오일과 셰일가스 개발붐으로 배관을 비롯해 가스와 기름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 공사에 강도가 높은 탄소섬유가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분야에서도 도레이는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독일의 다임러그룹 역시 도레이와 부품 개발(2010년)에 나서, 지난해 벤츠에 적용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탄소섬유 투자는 위협적이다.

 이 상무는 “중국 정부가 탄소섬유 자급을 위해 전략적으로 막대한 자금 지원에 나서고 있어 우리 기업들이 시장선점할 시간을 길지 않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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