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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가위질이 똑똑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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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9월 2일 개봉하는 스페인 영화 '루시아'(감독 홀리오 메뎀)는 뇌쇄적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체가 노출되는 건 기본. 흥분한 남성의 심벌이 짧게나마 클로즈업되고, 스크린 속 TV에는 포르노 영화도 흐른다. 그러나 역겨운 느낌은 없다. 각자 마음의 상처가 있는 남녀가 지중해의 한 외딴 섬에서 자신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 한줄기 꿈처럼 묘사된다. 이 영화는 최근 무삭제로 18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지난해만 해도 체모가 나오는 장면에 '안개 처리'를 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올 들어 성과 관련된 영화등급이 눈에 띄게 관대해졌다. 극장가에 '성의 혁명'이 시작됐다.

#섹스, 이제 금기는 없다

'루시아'를 수입한 영화사 스폰지의 조성규 이사는 '18세'를 기대하지 않았다. "일단 넣어보자"는 마음이 앞섰다. 사실 미국에서도 한국의 18세보다 엄격한 'NC17'(17세 이하 절대 불가. 실제는 별로 없다) 등급을, 그리고 편집본이 'R등급'(한국의 18세와 비슷)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감독의 연출 의도까지 첨부했다. 이에 대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반응은 의외였다. "우리도 영화를 영화로 판단하니 불필요한 서류는 내지 마라"고 했다. 표현 수위가 '루시아'보다 약했던 '정사'(파트리스 셰로)를 2년 전 들여왔을 때만 해도 "털끝 하나 안 보이게 화면을 가렸다"는 그였다.

예술영화 전용관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의 김난숙 팀장도 지난 6월 달라진 세상을 실감했다. 60대 후반 여성과 40대 유부남의 육체적 관계에 주목한 영국 영화 '마더'(로저 미첼)가 18세 판정을 받은 것. 영화에선 '남성'이 나오는 것은 물론 성교 장면을 스케치한 할머니의 그림도 상세하게 보인다. 그는 불과 1년 전 '차례로 익사시키기'(피터 그리너웨이)를 개봉할 때만 해도 등장 인물의 주요 부위를 뿌옇게 지워야 했다. 뿐만 아니다. '몽상가들'(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권태'(세드릭 칸), '에로스'(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의 화제작들도 올해 모두 무삭제.무처리로 개봉했다. '몽상가들' 무삭제판도 미국에선 'NC17' 을 받았다. 섹스 표현에서 일정 부분 한국이 미국보다 개방적인 셈이다.

#부분보다 전체를 본다

극장가에 섹스 표현의 한계를 넓힌 작품으론 지난해 상영된 '팻걸'(카트린 브레야)이 꼽힌다. 한 차례 '제한 상영가' 판정을 받았던 이 영화에선 사춘기 자매의 체모가 노출된다. '남성'이 제법 오래 나오는 같은 감독의 '섹스 이즈 코미디'도 지난해 18세로 개봉했다.

DVD의 표현 영역도 넓어졌다. 성폭행, 집단 난교 등으로 찬반 양론을 일으켰던 영국 작가 스탠리 큐브릭의 문제작 '시계태엽 오렌지'와 '아이즈 와이드 셧'도 19일 무삭제.무암전 버전으로 출시된다. '죽어도 좋아'(박진표.2002년), '나쁜 영화'(장선우.1997년), '노랑머리'(김유민.99년), '거짓말'(장선우.99년)의 개봉 당시 '콩 볶은 집안' 같던 우리 사회의 격앙된 분위기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영등위 이경순 위원장은 "영화를 보는 잣대가 부분에서 전체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영화로 보고, 몸의 아름다움을 즐길 만큼 문화적 공감대가 쌓였다는 것. 성에 대한 끊임없는 사회적 논란 속에서 영화와 신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서히 유연해졌다는 해석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도 "일부 장면을 확대 해석해 영화를 재단하는 유아적 태도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다'

영화등급은 특정 사회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일례로 '루시아''몽상가들'은 프랑스에서 12세, 핀란드에서 15세 등급을 받았다. 반면 노출 강도가 세지 않은 '에로스'는 싱가포르에서 21세 관람가로 상영됐다.

국내에서도 노골적 섹스를 앞세운 작품들은 대부분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제한 상영가'를 받곤 한다. 동물의 교미 장면을 부각한 북한 영화 '동물의 번식'은 수차례 등급 보류 끝에 내용을 대폭 줄여 지난달 18세 등급을 겨우 받았다. 성인영화 '두잇'(틴토 브라스)과 공포영화 '좀비오3'(브라이언 유즈나) 등도 과도한 성과 폭력으로 제한 상영가로 묶인 상태다. 요즘 영화계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가 마약 흡입과 가학적 섹스를 담은 자신의 소설을 직접 연출한 '도쿄 데카당스'에 대한 영등위의 판정에 주목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김은경 이사는 "두 번 연속 제한 상영가를 받았으나 영등위가 많이 달라진 만큼 다음달께 재심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체모.성기 등의 제약은 많이 없어졌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가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은 배고픔은 여전하다"고 주장했다.

국내 스크린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가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85년 '엠마뉴엘'을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영화계가 한국 사회의 검열과 감시를 피해 멀리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박정호 기자

"뭐만 보이면 안개 처리 우스꽝스러운 시절 지나" 이경순 영상물등급위원장

이경순(60.사진)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은 1999년 영등위 출범 당시부터 영화등급 실무를 맡아왔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영화를 보는 눈도 변해야 한다"는 그가 영등위의 오늘에 대해 입을 열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얼마 전만 해도 '○○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마농의 샘'(1986)에서 주인공 마농이 춤추는 장면에서 뭐가 보인다고 안개 처리를 했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시절은 지났다. 그만큼 사회가 성숙한 것이다."

-'죽어도 좋아'(2002년)가 논란이 됐었는데….

"3년 전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성의 상징이 정면에서 비친 적이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감독이 18세 판정에 반발했다.

"등급위원이 만장일치로 18세에 공감했다. 사적인 복수를 미화하는 대목이 가장 불편했다. 섹스보다 폭력의 수위가 셌다."

-'도쿄 데카당스'는 계속 제한 상영가다.

"영등위는 다수결에 따른다. 개인적으로 야하다기보다 슬픈 영화로 생각하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과다."

-한국과 외국의 등급을 비교한다면.

"미국.프랑스 등과 같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아직도 영등위를 '가위질' 하는 곳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앞으론 섹스보다 폭력을 엄격히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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