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아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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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글의 탄생은 제나라 글이 없는데다가 중국의 한자는 어렵고 우리말을 적는대도 전혀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글자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딱하게 여긴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이었다.
특히 봉건군주가 직접 만들어내고 이를 나라의 글자로 택했다는 것은 바로 투절한 민본주의를 실천함과 아울러 무분별하게 중국에 의존하던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민족과 국가의 자존과 주체성을 선언한 쾌거라고 보아 더욱 값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현실은 어떠한가? 주위를 둘러보면 한심한 일로 가득차 있다. 신문은 필요하지도 않은 한자를 마구 쓰는 타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가, 한글날이 돼서야 마지못해 사설 하나정도를 한글로만 쓰는,내키지 않는 선심을 쓰며,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은 외국어와 외국글자를 편애하는 나머지 꼬부랑 글자를 새긴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이고, 우리말은 외래어의 홍수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외국인들은 한글의 우수함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 있건만 막상 이를 자랑하고 지켜야할 우리는 한글의 우수함과 자랑스러움을 내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전시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한일이 아닐소냐! 표준말을 표준발음으로 방송하여 언어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표준말 보급에 앞장서야 할 일부 방송인들이 사투리를 전파하고 있을뿐 아니라 외래어는 한국발음 아닌 의국어의 원발음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가당치않은 노력을 하고있으니 이는 누구를 위한 방송이란 말인가.
또 최근에 당국에서는 우리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미 지난 25년간이나 한국의 공식적인 「로마자표기법」으로 채택되어 학교교과서를 비롯하여 지명·관광지명·문화재명·도로표시등, 전국에 보급되고 정착되어 있는 표기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를 개정하여 시행하는데 따르기 마련인 막대한 예산및 시간의 낭비와 혼란을 정당화할만큼 개정이 필요한 일인가를 우선 결정해야 할것이다.
또 현행 로마자표기법이 제구실을 못할만큼 부적당한 것인가를 학술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에야 개정의 여부를 결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한 이같은 면밀한 검토를 토대로하여 개정을 결정한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개정의 동기는 일부 외국인들이, 때로는 무책임하게 떠드는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의견과 제안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너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결과로 보아지므로 더욱 당위성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언어에 관련된 문제는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다. 영어는 철자법이 그렇게 무질서해도 고치지 않고있다. 아니, 못하고 있는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세종대왕에게서 5백년전의 주체성과 소신을 다시금 본받아야하겠다. <이현복>
▲1931년 충남보령출생 ▲서울대대학원졸 ▲영국런던대대학원졸(철학박사) ▲현서울대인문대교수(언어학) ▲저서=『국제음성문자와 한글음성문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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