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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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단독요담을 마치고 등소평과 나는 각의실로 가 보좌관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여기서 등의 태도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바뀌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은 끝났기 때문일까. 이날 회담은 전날보다 훨씬 가볍고 여유 있게 진행됐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재산청구권 등 남은 과제들을 협의했다(재산청구권 문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을 때 미·중공이 각기 자기나라안에 있는 상대국의 재산을 몰수한데서 비롯했다.) 등은 이 복잡한 일들의 세부사항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중공에 최혜국대우를 해주는 경우 따르는 문제, 즉 최혜국 속에 중공은 포함시키고 소련은 빼 놓는다면 불균형이 빚어지리라는 점을 설명했다. 등은 이민정책에 관한 한 중공과 소련을 같이 놓고 봐선 안 된다고 응수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인 1천만 명을 미국으로 풀어 놓아주기를 바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좌 중에 폭소가 터진 것은 물론이다.
나는 학생교환계획에 관한 불만점도 거론했다. 중공에 갈 미국학생들은 중국학생들과 함께 살거나 중국인가정에서 묵을 수 없으며 미국인들끼리 거의 격리돼 살아야한다는 그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등은 중공에는 미국인들이 바라는 최소한의 편의기준을 채워줄 만한 주거시설이 모자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지만, 내겐 미흡한 해명이었다.

<기자 만명 보내겠다>
나는 또 한 가지를 지적했다.『귀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생 숫자에 일단 합의한 뒤에는 개인적인 선별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등은 미소지으며 중공은 미국학생 몇 명쯤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은 튼튼하다고 받아넘긴 후, 사상을 근거로 학생들을 고르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 중공에 갈 미국기자들은 여행의 자유를 조금 제한 받겠지만 기사검열은 없으리라고 말했다.
나는 아까 그가 1천만명의 중국인을 보내주겠다고 제의했으니 이쪽에선 보답으로 기자 1만명쯤 보낼 용의가 있다고 했다. 등은 껄껄 웃으며 즉각 사양했다.
-등에게 (미국에 있는 동안 공개 발언을 할 때) 대만문제를 언급하면서「평화로운」과「참을성」등의 표현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대만에 중공과의 협상을 권유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또 비 타협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거나 소련이 대만에 진출하지 않는 한 중공은 참을성을 가지고 평화로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이후엔 대만에의 무기판매는 신중히 해달라며 중공이 어떠한 무기판매도 찬성하지 않음을 밝혔다. (일기·79년1월30일)
무기판매 얘기가 나온 김에 나는 얼마전 이 문제에 관해「브레즈네프」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을 등에게 얘기해 주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 답장에서 중공과 소련 어느 쪽에도 무기를 팔지 않는다는 게 미국의 정책이나 다른 동맹국들의 방침엔 간섭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예, 미국의 입장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등의 대답이었다.
등은 의회를 방문했을 때도 생기 넘치고 익살스런 말을 많이 해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사람들은 거드럭대지 않으면서도 조용한 자신감과 자기나라에 대한 긍지를 나타내는 재주를 터득한 듯 했다.

<등, 의회방문 때 익살>
「브레진스키」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할 때의 일이다. 「브레진스키」는중국인과 프랑스인은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두 국민모두 자기네 문화가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다는 얘기였다. 등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동아시아에선 중국음식이 제일이고, 유럽에선 프랑스 음식이 최고라고.』
마지막 회담에서 등과 나는 영사관설치, 무역, 과학기술 및 문화교류 등에 관한 협정들에 서명했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등에게 물었다.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했을 때 중공국내에서 혹시 정치적 반대가 없었습니까?』 모두들 숨을 죽이고 등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등이 말했다.
『물론 있었죠.』
한 박자 쉬고 나서 그는 말을 이었다.
『한 지방에서 강력히 바래하고 나섰어요. 대만 말입니다.』
유쾌했던 의전절차는 모두 끝나고 이제는 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어려운 작업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착실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극성스런 우익정치 활동단체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이들은 아직도 미국이 어떻게든 장개석의 후예들이 본토를 탈환하도록 도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대만이 곧 중국이었고, 어떻게 달리 설득할 도리가 없었다. 이들은 중공승인을 위해 내가 취해온 조치들을 뒤엎을 수 있는 법을 원했다. 아니면 적어도 새 법안 속에 중공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을 넣어 중공이 모든 협정을 취소토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행히 주도권은 우리가 잡고 있었다.
-「밴스」에게 대만관계 입법에선 아무런 양보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만약 그 법안이 내가 중공에 한 약속을 어기는 내용으로 수정되거나, 대만안보에 관한 표현이 방위조약 자체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되면 대만과는 어떠한 실질적인 교섭도 합법적으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기·79년3월7일)
거부권행사위협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만에 대해서도 책임 있게 행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해가 다 갈 때까지 우리는 의회와 이 법안을 다듬었다.
대만과의 방위조약이 소멸되고 중공과의 협정이 발효되기 바로 며칠전인 78년 섣달그믐께 법안은 의회를 통과했다.
중공문제는 내가 대통령으로서 치러낸 외교정책과제들 가운데 취임 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유쾌하고 만족스런 결과를 낳은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 나는 중공과의 교섭이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었다. 일이 빗나갈 여지는 적지 않았다.

<끝까지 약속 지켜 줘>
대만에 관해 우리가 제시한 확고부동한 원칙들을 중공이 고집스럽게 거부할지도 모르고, 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예기치 못한 골칫거리 사태가 터질 수도 있었으며 미·중공이 어떤 문제를 두고 날카롭게 대립해 다른 모든 일이 뒤로 젖혀지게 될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미국국민이 나의 의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수교노력이 허사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아주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중공사람들은 미국대통령으로서 내가 지고있는 다른 책무들과 우리국내 정치현실 등을 잘 이해하고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중공지도자들은 SALTⅡ나 대만문제. 미·중공의 새 관계가 서 태평양지역에 미치는 안정효과, 그리고 미·중공·일본 3국 협력의 필요성 등에 관해 우리에 협조적인 발언을 해주는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양국 관계가 반소적 색깔을 띠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이들과 상대하면서나는 중국인들이 세계 제1의 문학민족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을 깨닫게 했다. ◇다음 회부터는 「캠프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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