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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0개월치 '월급'써야 한국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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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공무원에게 이만큼 줬어요”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인도네시아 노동이주부 송출담당 공무원에게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1000만 루피아(약 1100만원)를 준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이 송금 영수증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노동이주부에 송출 희망 서류를 접수한 이스타디(34)는 올 4월 21일 한국의 모 중소기업으로부터 표준근로계약서를 받았다. 이 계약서는 "채용하겠으니 들어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스타디는 비자만 받으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국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담당 공무원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비자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송출 브로커 사타야는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8월 17일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뒤 한국과 인력 송출 양해각서(MOU)를 맺은 동남아 일부 국가의 공무원들이 인력 송출 과정에서 근로자들을 상대로 거액의 뇌물을 챙기고 있다. 송출 비리 근절이란 고용허가제의 당초 목적이 무색하다.

◆ 다단계 비리구조 형성=지금까지 이스타디가 쓴 돈은 줄잡아 2000만 루피아(약 200만원)에 달한다.

한국어 교육을 받느라 사설 한국어학원 등록비로 700만 루피아를 썼다. 인도네시아 공무원이 100시간 안팎의 한국어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접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체결한 양해각서에는 이런 항목이 없다. 자카르타의 한 한국어학원 관계자는 "100여 시간 공부해서 한국어를 잘할 수 있겠는가. 이수증은 공무원이 학원과 짜고 돈을 챙기기 위해 사고 파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털어놨다.

인도네시아는 올 5월 8일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렀다. 한국어능력시험은 한글학회가 주관하게 돼 있는데다 다음달 11일에나 첫 시험이 치러진다. 양해각서를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셈이다.

한국어 교육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공무원에게 직접 돈을 찔러 줘야 한다.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 접수할 때 각각 최소 300만 루피아가 든다. 중앙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으로 보낼 송출 대상자 명부를 작성하면서 '명부에 넣을지 안 넣을지'를 두고 또 돈을 요구한다고 한다. 400만 루피아 정도다. 인도네시아는 이렇게 만든 명부를 한국에 보낸다.

한국 기업은 노동부 고용안정센터에 비치된 송출국의 명부를 보고 필요 인력을 뽑고, 해당자의 이름을 명시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들어 노동부를 통해 송출국에 보낸다. 뽑힌 인력은 한국에 들어오면 3년간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계약서를 받았다고 무조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무원에게 뒷돈(1500만~3000만 루피아)을 주지 않으면 한국 정부에 "해당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출국을 의도적으로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뒤 우리 중소기업들이 인력난에 허덕이는 이유다.

이런 식으로 부패 고리가 형성되다 보니 일부 인도네시아 근로자는 산업연수생제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산업연수생제 아래서는 송출 비용이 2000달러 정도였다. 고용허가제의 송출 비용은 공식적으로 250~300달러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단계 비리 구조 속에서는 고용허가제 비용이 산업연수생제의 2~3.5배인 4000~7000달러에 달한다.

◆ 한국 정부 개입도 한계=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현지의 이런 비리를 적발하고, 6월부터 '송출 중단'조치를 내렸다. 지난해 8월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뒤 처음으로 제재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태국과 베트남 등에서도 유사한 송출 비리가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공무원에게 뒷돈을 주면서까지 한국에 오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균 400만~700만원을 들여 한국에 오더라도 3~6개월이면 본전을 뽑는다. 한국에서의 월급 100만원과 잔업수당 등을 알뜰하게 모았을 때의 얘기다. 자카르타 외곽 한국어 학원에서 만난 주나이디(33)는 "사우디아라비아.말레이시아 등 다른 나라보다 한국의 임금이 훨씬 높아서 3년간 한국에서 일하다 오면 우리 지역에선 귀족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조만간 인도네시아 등에 인력 송출 지원단을 파견할 방침이다. 또 표준근로계약서를 받은 근로자가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도록 계약서와 함께 전자사증을 함께 보내는 방안도 강구 중이다.

자카르타=김기찬 기자

"송출 비리 인정 … 제도 바꿔 바로잡겠다"
알로위 인도네시아 노동이주부 차관

"고용허가제가 도입된 뒤 송출 과정에서 우리 내부의 부정과 비리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시인한다. 앞으로 제도 개선을 통해 이런 문제를 바로잡을 것이다."

체피 F 알로위 인도네시아 노동이주부 차관(사진)은 비교적 솔직하게 고용허가제를 둘러싼 자국 내의 부정부패를 시인했다. 그는 다음 달에 단행될 예정인 개각에서 노동이주부 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인도네시아에선 고용허가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정부 대 정부의 약속에 의해 양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좋다. 그만큼 우리 근로자들의 인권도 존중된다는 점을 잘 안다."

-인도네시아 안에서 송출을 둘러싸고 잡음이 많은데.

"송출 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가 많다는 점을 시인한다. 앞으로 교육훈련소를 설립하는 등 제도를 개선할 것이다. 한국도 이를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

-한국 정부로부터 송출 중단이란 제재 조치를 받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행정 절차의 비리 때문이다. 노동이주부 직원들의 비리 혐의도 짙다. 선별 과정에서 브로커가 개입하고 지방정부가 부정을 저지르는 등의 문제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 앞으로는 이를 질책하고 막을 것이다. 한국 정부에 이해를 구하고 송출이 재개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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