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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국제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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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가가 연일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미국의 기름값도 많이 올랐다. 그러나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난 12일 기준으로 미국의 평균 기름값은 갤런(1갤런은 약 3.8ℓ)당 2.49달러(무연 보통 휘발유)로 한국의 40% 수준이다. 이것도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자동차가 신발이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기름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저렴한 수준으로 값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정책의 우선 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 배명복 국제담당 에디터

미국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약 20분의 1이다. 그러나 세계 산유량의 4분의 1이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다. 미국은 원유의 53%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과 상품의 흐름이 당장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항공.건설.석유화학.운송.농업 등 기간산업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뒷받침하는 각종 군사장비의 운용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미국은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3분의 2가 몰려 있는 걸프 지역에 일찌감치 침을 발라 놓았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페르시아만을 장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미국의 사활적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그 공격은 군사력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통해 격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른바 '카터 독트린'이다. 정권이 변해도 카터 독트린은 철칙으로 유지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반전단체가 즐겨 외친 구호 중 하나가 '노 블러드 포 오일(No Blood for Oil)'이다. 석유 때문에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과 9.11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와의 연계 가능성을 침공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속셈은 이라크 석유자원의 확보라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이라크의 석유 매장량은 1130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다. 미 에너지부는 이라크의 미확인 매장량을 2200억 배럴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미국의 98년치 수입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게다가 이라크의 원유 생산단가는 배럴당 0.97달러에 불과하다. 북해산 브렌트유의 3~4달러와 비교하면 보통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은 오래전부터 이라크에서 제2의 골드러시를 꿈꿔 왔다.

이란의 핵 활동 재개와 관련, 엊그제 부시 대통령은 군사적 대응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란은 세계 3위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다. 산유국이 대량살상무기까지 손에 넣는 것은 미국으로선 악몽의 시나리오다. 영국.독일.프랑스가 발벗고 중재에 나서고 있는 것은 이라크 석유는 미국이 차지했지만 이란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중국이 이란 핵 문제의 안보리 회부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석유 탓이 크다. 중국해양석유공사(CNOOC)가 미국의 셰브론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미 석유회사 유노칼 인수에 실패한 것은 석유자원 확보 경쟁에 뛰어든 중국의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미 정치권의 오기 때문이다.

핵 개발 수준으로 보면 북한이 이란보다 열 발짝은 앞서 있다. 하지만 서방 언론은 이란 핵 문제를 훨씬 큰 이슈로 다루고 있다. 북한이 산유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크로퍼드 목장에서 휴가 중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콜롬비아 대통령을 초대해 극진히 대접한 것도 콜롬비아가 산유국이기 때문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미국이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카자흐스탄 등 카스피해 연안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석유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석유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평소 보이지 않던 문제도 잘 보이는 경우가 많다. 미 국제정치학계에서 사이놀로지(sinology.중국학)와 트랜스내셔널리즘(초국적주의)이 새로운 인기 과목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페트로폴리틱스(petropolitics)의 위상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석유의 국제정치학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배명복 국제담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