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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찼던 한일회담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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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일국교정상화의 일본측주역으로 자민당 부총재까지 지낸「시이나·에쓰사부로」(추명열망절) 전 일본외상의 일기와 외교메모를 정리한 『기록-추명열삼낭』이 9백90페이지의 책으로 발간됐다. 「시이나」가 생전에 교류하던 정계·재계· 언론계인사들로 구성된「시이나」추도록 간행회에서 펴낸 이 책은 한일조약 교섭막후의 비화와 문세광 사건 등을 둘러싼 당시 일본정부의 대응 등 새로운 사실들을 상세히 싣고 있다.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주요기록을 발췌, 소개한다.<편집자 주>
74년8월15일, 이날은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29회 째 종전기념일이었다.
규우만 (구단) 에 있는 일본무도관에서는 상오11시51분부터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전몰자 추도식이 베풀어 지고있었다.
이 자리에 나온 6천여 명의 참석자들이 저마다 8·15의 회상에 잠겨있을 무렵「가스미가세끼」(하관)의 일본외무성에서는 서울에서 날아든 급보에 넋을 잃을 만큼 당황했다.
「박 대통령이 피격됐다. 대통령은 무사하나 총탄을 맞은 영부인이 중태」,「범인은 일본인인 듯」.날벼락 같은 엄청난 사건의 보고였다.
외무성과 정부각료 등의 놀라움은 대통령저격 그 자체보다도「범인이 일본인 같다」는 한마디였다.
범인이 일본인이 아니고 문세광이라는 재일 한국인으로 밝혀진 것은 그 뒤 한참 지나서 였다.
외무성은 즉시「일본정부는 법률적·도의적 책임이 없다」라는 일본측 공식 입장을 기자단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는 그 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격앙시키는 등 긴 후유증으로 일본정부를 괴롭힌 불씨가 되었다. 이 코멘트를 한 외무성 동북아과장은「범인이 일본인인 듯하다」는 1보에 낭패한 나머지 일본정부와 책임과 한일관계의 파국을 잇달아 연상, 괴로워하던 참에「일본인이 아니다」라는 낭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 같은 말을 내뱉고만 것이다. 그날 밤 5시간40분간에 걸친 수술도 보람없이 영부인이 운명했으며 그 다음날 일본정부는 다시금 충격에 뒤흔들렸다.
「마찌무라」(정촌) 국가공안위원장이 이날 각 의에서 문세광이 사용한 권총은 이해 7월l8일 오오사까부경의 경찰서에서 훔친 2자루가운데 하나이며 다른 한 자루는 문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고 보고한 것.
이보다 한 달쯤 지난 8월19일 자민당 부총재이던「시이나」는 l7명의 일본진사 사절단을 이끌고 김포공항에 도착, 그 길로 국립묘지로 향해 영부인 묘소에 헌화·묵도를 올렸다.
「시이나」 특사와 만난 9월19일 밤 박 대통령은 고열에 설사를 하는 등 급환을 일으켰다.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박 대통령은 이날밤 술을 많이 마셨다. 문세광 사건으로 부인 육 여사를 잃은 후 1개월 이상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던 술을 이날 밤에는 막걸리 10잔 이상을 마셨다는 얘기였다.
「시이나」는 77년11월 한일친선협회 회장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시이나」회장을 맞은 박 대통령은 이례적인 접대를 해서 두 번을 놀라게 했다. 차가 도착하자 현관에서 기다리던 박 대통령은 직접 차 문을 열어 그를 맞았고 돌아갈 때도 허리를 감싸듯해서 자동차를 태워주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교섭은 이 사건보다 12년 앞선 62년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를 전후해서 급진전됐다. 박 의장이 미국방문에 앞서 일본을 공식방문하기로 결정되자 한·미·일 3국간에 접촉이 활발해졌다.
64년5월 정일권 내각의 대일 교섭실무책임자로 이동원씨가 외무장관으로 기용됐다. 같은 해 10월 김동조 주일대사가 부임, 이보다 앞서 같은 해 7월에는「시이나」가 외상으로 등용됐다.
「시이나」는 다음해인 65년2월17일 방한, 김포공항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일장기가 펄럭였다.
「시이나」는 도착성명에서『양국간의 긴 역사 속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스러울 따름이며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도착성명작성에는 곡절이 많았다. 한국정부의 뜻에 따라 김동조 주일대사는 일본 외무성의「우시로꾸」(후궁호낭·전 주한대사) 아시아국장에게『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선발대로 먼저 서울에 가있던「마에다」(전전이일·현 주한대사)조사관으로부터도 현지의 이 같은 공기를 전하는 전문이 날아들었다.
처음「우시로꾸」국장 등은「36년간문제」에 약간 색채를 가미해서「한일간에는 과거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도 있었으나…」 라는 한 구절을 넘었다.
이것을 미리 서울의「마에다」조사관에게 전문으로 알렸다. 그러나「마에다」조사관으로부터는 즉각『이런 것으로는 지금 한국의 공기를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다. 좀더 강한 표현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결국「유감스럽고」라는 문구를「불행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며」라고 고치고 여기에「깊이 반성한다」는 말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반성의 주체가 누구인지, 일본정부인지, 외무성인지, 외상 개인인지 모호하게 되어있다. 18일 열린 1차 외상회담부터 난항이 시작됐다. 19일의 2차 회담에서도 밤 12시가 지나도록 계속됐으나 타결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양국간의 교섭은 결렬돼 결국 가조인은 불가능하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일본대표단의 귀국전날인10일 밤「시이나」주최로 만찬이 있었다. 파티중간에 이동원은「시이나」에게 다가가 귀엣말로『둘이서 장소를 옮겨 마시자』고 제안했다.
두 외상은 연하귀, 「우시로꾸」양국 아시아국장만을 대동하고 자리를 떴다.
「시이나」일행은 이 장관이 안내한 요정을 가보고 놀랐다. 육해공군 장성들이 제복을 입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 고위강성들은 정복차림으로 요정에 앉아 외상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이는 회담지속을 위한 박 대통령의 계략이었다. 이 장관이 교섭에 지쳐 회담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
네 사람은 자리를 옮겨 회담을 계속했다.
「시이나」는 이번에 타결되지 않으면 한일교섭은 수년간 늦어질 것이라고 주장, 현 상태에서의 가조인을 요구했다.
이 장관은 진해에 있던 박 대통령에게 연락, 재가를 얻었다.
이때가 20일 상오1시.「시이나」는 국제전화선부족으로 미군의 특별회선을 이용, 20일 상오6시부터 자민당 및 정부수뇌와 연락,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한일기본관계조약은 20일 하오 양국외상입회아래 가조인 됐다.
한일관계에서 김대중 사건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사이나」는 김대중 사건 전에 딱 한번 김대중의 방문을 받고 그와 만난 일이 있다.
다음은「시이나」의 외상이다.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얘기를 듣고있는 중에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나 한국정부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했다. 첫 대면의 외국인에게 자기나라의 대통령이나 정부를 나쁘게 말한다. 이것은… 하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만날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대답도 않고 있었더니 가버렸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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