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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사이 줄타는 후쭝난 … 국·공 양당 물밑서 영입 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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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29면

쑹메이링의 친정 조카 쿵링쥔(왼쪽 둘째)은 장제스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 남자 복장에 여성 첩을 여럿 거느리며 총 쏘기와 자동차 경주를 즐겼다. 가는 곳마다 쿠바산 시가를 물고 다녔다. [사진 김명호]

사관학교의 경우, 후배는 있어도 선배는 없는 1기생 중에 걸물들이 많다. 황푸군관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황푸 3걸 장셴윈(蔣先雲·장선운)과 허중한(賀衷寒·하충한), 천껑(陳賡·진갱)도 한결같이 1기생이었다. 공산당원 장셴윈은 교장 장제스가 가장 총애하던 학생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했고 졸업도 1등으로 했다. 25세 때 동북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문무를 겸비한 대장군감을 잃었다”며 며칠간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허중한은 언변이 뛰어나고, 천껑은 행동이 민첩했다. 훗날 국민당군 최대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는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은 학생시절 기회주의자, 좋게 말하면 신중하기로 유명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2>

능력이 있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군인들은 민간인들보다 더하다. 후쭝난은 운이 좋았다. 입학 시험날 시험관에게 대든 것이 당 대표 랴오중카이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덕분에 군관학교 상층부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랴오중카이의 집무실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툭하면 장제스와 마주쳤다. 장제스는 동향의식이 강했다. 같은 저장(浙江) 출신인 후쭝난을 남다르게 대했다.

당시 국·공 양당의 합작은 말뿐이었다. 뒤로는 각자의 세력을 확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푸군관학교도 온전할 리 없었다. 공산당은 좌파조직인 중국청년군인연합회와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장제스는 우파조직인 쑨원주의학회(孫文主義學會)를 뒤에서 후원했다.

장제스는 황푸 교육장인 일본 육사 동기생을 통해 후쭝난에게 국민당 입당을 권했다. 후쭝난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일에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교장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다”며 순순히 응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쑨원주의학회 행사에도 잠시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국민당 우파 측에서 기회주의자라며 온갖 험담을 퍼부어대도 대꾸하지 않았다.

청년 시절의 후쭝난. 1927년 봄 항저우.

군관학교 내에 같은 고향 사람은 장제스 하나가 아니었다. 중공 초기 당원인 학교 위병사령관 후궁몐(胡公冕·호공면. 신해혁명의 원로. 한국전쟁 시절 평양을 여러 차례 다녀갔다)도 후쭝난과 동향이었다. 후궁몐은 후쭝난에게 연극반 가입을 권했다.

후쭝난은 연극반 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연기도 제법이었다. 연극반을 지도하던 저우언라이는 후쭝난을 뺏어오기로 작정했다. 장셴윈과 천껑을 파견했다.

두 사람을 만난 후쭝난은 속내를 털어놨다. “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공산주의가 체질에 맞는다. 현재 군대와 경제는 국민당 수중에 있다. 군대는 돈이 없으면 지탱할 수 없다. 공산당의 주장은 나무랄 데가 없다. 단,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나는 군복을 입고 죽는 것이 소원이다. 국민당이건 공산당이건 상관없다.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정당, 내가 명예롭게 죽을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정당이 어딘지 관망 중이다.”

국민당은 후쭝난 설득을 허중한에게 일임했다. 말 잘하기로 소문난 허중한은 기회를 엿봤다. 광둥 군벌과의 전쟁터에서 후쭝난의 거처를 찾아가 설득했다. “사람들은 네가 공산당원이라고 의심한다. 군대에서 죽을 곳을 찾으려면 국·공 양당 중 어느 곳과 함께할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잘 알겠지만 현재 상황은 공산당에 불리하다. 내일 다시 오겠다. 확답을 주기 바란다.” 이튿날 허중한이 술 한 병과 삶은 돼지고기 들고 나타났다. 후쭝난은 국민당 입당을 약속했다.

후쭝난의 일거일동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흡족해했다. 하루는 두 사람 사이를 더 끈끈하게 만들 일이 발생했다. 광저우 시내의 군관학교 연락사무소로 향하던 장제스의 승용차가 발동이 꺼졌다. 다른 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리를 마친 자동차가 뒤따라오다 습격을 당했다. 장제스는 긴장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후쭝난을 발견하자 왜 왔느냐고 물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후쭝난은 숨이 가빠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교장을 지키러 왔습니다. 교장의 안전을 위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떠나라고 하셔도 가지 않겠습니다.” 이날 이후 장제스는 후쭝난을 내놓고 신임했다.

장제스가 정권을 잡자 후쭝난은 승승장구했다. 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사단장과 군단장, 군 사령관을 제일 먼저 역임하며 자신의 계파를 형성했다. 장제스 부부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쿵링쥔(孔令俊·공영준)과의 결혼 요구만은 거절했다. ‘민국괴물’ 쿵링쥔은 그 유명한 쿵샹시(孔祥熙·공상희)의 둘째 딸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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