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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사가 젠보짠 “펑위샹 장군은 중국 진보의 상징”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5〉 1968년 문혁 발발 2년 후, 비판대에 끌려 나온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사후에 총명한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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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위샹 심복 위신칭 “공산비적과 내통한 원조는 쑨원”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4〉 육군검열사 시절의 펑위샹(가운데). [사진 김명호] 1966년 문혁 초기, 신중국 국가의전의 창시자 위신칭(余心淸·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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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우리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나라에 태어났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0〉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선쥔산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대화 녹취도 수락했다. 일국양제의 시험구 홍콩반환 기념식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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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프로포즈 받은 쑹메이링의 첫 마디는?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蒋介石 장개석, 1887-1975)는 중국 저장(浙江)성 펑화(奉化) 사람이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옮겨갔지만, 그가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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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압력에 콩링칸 풀어준 장징궈 술 마시고 대성통곡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국민당 원로 주자화(오른쪽)를 영접하는 우궈쩐. 1949년 1월 28일, 상하이 공항. [사진 김명호] 베이핑(北平)에서 긴급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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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사촌 비리 겨눈 장징궈, 계모 쑹메이링이 말렸지만…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쑹메이링(앞줄 가운데)이 가는 곳에는 어디건 콩링칸(앞줄 왼쪽)이 있었다. 1943년 4월 4일 오후 3시, 미국 할리우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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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등등 장징궈, 장제스 의형제 두웨셩 아들도 체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쑹메이링(가운데)은 조카 중 콩링칸(오른쪽 둘째)을 총애했다. 25살 연상 유부녀와 결혼할 때도 너만 좋으면 된다며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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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같은 밥도 여기서 먹으면 맛있어” 쑹칭링 달래
1 중국을 방문한 호치민(胡志明)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쑹칭링. 1955년 7월, 베이징. 혼자 사는 여인들은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을 선모(羨慕)했다. 이유가 있었다. 쑹칭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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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푸 “못나게 굴다 공산당에 정권 송두리째 헌납”
1 중일전쟁시절 쿵샹시(왼쪽 셋째)와 함께 주중 외교사절 초청 다과회에 참석한 천리푸(오른쪽 둘째). 1938년 가을 전시 수도 충칭.정당연합은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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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푸 “못나게 굴다 공산당에 정권 송두리째 헌납”
1 중일전쟁시절 쿵샹시(왼쪽 셋째)와 함께 주중 외교사절 초청 다과회에 참석한 천리푸(오른쪽 둘째). 1938년 가을 전시 수도 충칭. 정당연합은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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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남편’ 된 구웨이쥔, 남편에게 소개 받은 옌유윈
60여년 만에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오른쪽)과 71년 만에 해후한 옌유윈. 1974년 7월, 뉴욕. [사진 김명호] 1928년 초,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전국을 석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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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3] 남편 양광성에게 다음 남편 구웨이쥔 소개받은 옌유윈
[60여년 만에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과 71년 만에 해후한 옌유윈. 1974년 7월, 뉴욕.]1928년 초, 난징의 국민정부가 전국을 석권했다. 상하이에 상주시킬 주재원을 물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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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생명 은인 쿵링쥔이 무슨 일 해도 ‘오냐오냐’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와 연애 시절, 쑹메이링은 장제스를 만날 때마다 친정조카 쿵링쥔을 데리고 다녔다. 1926년 가을 상하이. [사진 김명호] 쿵링쥔(孔令俊·공영준)은 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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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 쿵린쥔, 이모 쑹메이링 빼닮아 주변서 쑥덕
쑹메이링이 가는 곳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쿵링쥔(왼쪽 첫째)이 있었다. 1943년 2월 장제스를 대신해 미국을 방문한 쑹메이링. [사진 김명호] 중국은 복잡한 나라다. 알다가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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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사이 줄타는 후쭝난 … 국·공 양당 물밑서 영입 작전
쑹메이링의 친정 조카 쿵링쥔(왼쪽 둘째)은 장제스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 남자 복장에 여성 첩을 여럿 거느리며 총 쏘기와 자동차 경주를 즐겼다. 가는 곳마다 쿠바산 시가를 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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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에 항모 건조 제안한 38세 함대 사령관 천샤오콴
해군부장 시절 장제스의 손위 동서인 콩샹시(孔尙熙·앞줄 왼쪽 둘째) 재정부장과 함께 독일을 방문한 천샤오콴(왼쪽 셋째, 해군 제복 차림). 1937년 4월 베를린.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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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에 항모 건조 제안한 38세 함대 사령관 천샤오콴
해군부장 시절 장제스의 손위 동서인 콩샹시(孔尙熙·앞줄 왼쪽 둘째) 재정부장과 함께 독일을 방문한 천샤오콴(왼쪽 셋째, 해군 제복 차림). 1937년 4월 베를린.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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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인심’ 후했던 위유런, 쑹즈원·쿵샹시에겐 인색
대륙 시절, 부총통에 선출된 경쟁자 리쭝런(李宗仁)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심계원장 위유런(오른쪽 둘째). 1948년 4월 29일, 난징. 다음날 감찰원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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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1) ‘천중밍 맨’ 장제스
외국생활 오래한 사람일수록 토종(土種)들을 얕잡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대수롭지 않게 봤던 것처럼 쑨원도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참모가 고작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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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밍 맨’ 장제스, 광둥군 반란 소식에 쑨원 편으로
1922년 초, 쑨원이 광시(廣西)성 구이린(桂林)에 북벌군 사령부를 설치하자 모친상을 치르던 장제스는 구이린으로 달려와 종군했다. 정월 대보름날, 장징장(張靜强)에게 보내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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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0) 쑹메이링, 오빠가 소개한 류지원과 2년 열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 당일, 부하와 지지자들 앞에서 북벌을 선언하는(北伐誓師) 장제스.1926년 7월 9일 광저우(廣州) 둥샤오창(東校長).[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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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오빠가 소개한 류지원과 미국에서 약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 당일, 부하와 지지자들 앞에서 북벌을 선언하는(北伐誓師) 장제스.1926년 7월 9일 광저우(廣州) 둥샤오창(東校長).[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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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6) 쑨원
▲“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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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펑위샹과 합작 위해 베이징行 도착 후 자리보전
“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