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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④경제] 40. 기업의 도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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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화살보다 과녁이 더 빨리 움직인다. 반도체는 그렇게 어렵다. ”

신국환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1981년 11월 전자전기공업국장이 된 뒤 최순달 전자연구소 소장을 만나 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반도체를 우리가 만들면 그 순간 이미 구식 상품이 돼 시장에서 팔 수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논리였다. 반도체에 투자하면 국가경제가 위태롭다는 지적도 있었다. 64KD램 생산 라인 두 개만 지어도 1조원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가예산이 8조원 수준인 경제규모에서 나올 법한 주장이다. 더구나 그때는 반도체가 첨단기술이라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들만의 리그’로 경쟁하던 시장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먼저 투자를 검토했다. 그러나 최종 결심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60년대 근대화 과정부터 정 회장과 이 회장은 끊임없는 경쟁관계였다.

▶ 1981년 9월 담소를 나누는 한국 재계의 두 거목, 이병철 삼성 회장(왼쪽)과 정주영 현대 회장.

어느날 신 전 장관은 정 회장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신 전 장관이 슬그머니 이 회장 얘기를 꺼내 정 회장을 자극했다. 신 전장관의 회고다.

“현대는 망할 겁니다. 70년대에 먹고 살던 땅 파고(건설업), 쇠 깎는(중공업) 산업밖에 더 있습니까. 앞으로 먹고살 기술이 없잖습니까.”(신 전 장관)

“먹고살 기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 회장)

“앞으로는 반도체 등 전자업종을 해야 합니다. 이 회장이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아요.”(신 전 장관)

“우리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정 회장)

철이 ‘20세기 산업의 쌀’이라면 ‘21세기 산업의 쌀’은 반도체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민·관 양쪽에서 다 했다. 하지만 반도체 투자의 최종 결단은 정부 몫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국가 주도로 산업발전을 하면서 모든 일이 ‘정부 허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면 되잖아”

▶ 1980년대 삼성 반도체 공장의 내부 모습.

정부가 허가해 줄 것이라는 신 전 장관의 귀띔에 정 회장은 서둘러 미국 실리콘밸리와 IBM사를 찾아갔다. 그런 뒤 현지에서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IBM의 존 오펠 회장을 만나 “우리와 합작하자”고 제안했다. 오펠 회장은 “그런 경험이 없어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정회장은 “우리가 하면 되잖아!”라고 했다.

그는 IBM에 근무하던 한국 출신 박사 4명을 만났다. 배명승 박사와 천동호 박사 두 명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액인, 각각 연봉 10만 달러로 스카우트했다. 경기도 이천에 현대전자 공장터도 마련했다. 라이벌인 이 회장은 정 회장 동향을 듣고 깜짝 놀랐다. 생각은 먼저 해놓고 행동이 한 발 늦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IBM에 있던 나머지 두 명의 한국인 박사(이일복, 이상준)를 스카우트했다. 당시 김광호 삼성반도체 이사는 동분서주하며 수원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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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됐노-, 어이됐노-.”
수원 반도체공장을 지으면서 임직원들은 이 회장의 재촉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신 전 장관은 “이 회장이 정 회장보다 반도체 진출 결심은 늦게 했지만 공장 완공은 20여 일 빨랐을 정도로 경쟁했다”며 “더구나 정 회장은 반도체가 불투명하자 추진을 서두르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반도체를 발판 삼아 디지털시대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의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는 ‘신경영’으로 밀어붙였던 덕분도 컸다. 그는 품질을 위해 휴대전화 15만대를 소각하면서 세계 최고의 상품인 애니콜을 탄생시켰다. 삼성은 이런 세계 1위상품을 18개나 갖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순익 103억 달러로 ‘100억 달러 클럽’에 드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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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도 마찬가지다. 전자에선 빛을 못 봤지만 자동차에서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정 회장의 아들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수출 주도의 품질경영으로 세계적인 자동차그룹으로 끌어올렸다. 98년 미국 수출은 9만 대에 불과했지만 그가 취임한 첫해인 99년에는 두 배 가까운 16만 대를 팔았다. 이후 매년 10만 대 안팎을 더 늘려 지난해는 41만8000대를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6대 자동차 메이커로서 국내 총수출의 12%(지난해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평가기관인 J D 파워는 지난해 상반기 초기품질지수(IQS)에서 쏘나타가 중형차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도요타와 독일 벤츠 등을 앞질렀다. 이를 두고 자동차 전문지인 미국 오토모티브뉴스는 “Man Bites Dog(사람이 개를 물었다)”이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극찬했다. 국내 1, 2위 업체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오늘은 이렇게 화려하다. 자본과 기술, 경험이 부족한 척박한 땅에서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기업인들이 일궈낸 성과다.

한국 경제는 40여 년 전 가발과 섬유를 수출할 당시만 해도 세계 81개국 중 최하위권인 66위(64년 유엔 보고서·1인당 국민총생산 기준) 에 불과했다. 그러나 80년대 초까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82년 세계 28위(국내총생산 기준)로 급성장했고, 이어 전자·자동차 산업 등의 발전으로 명실상부한 10위 국가로 도약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 기업인들은 ‘화살보다 더 빠른 과녁을 따라가서 맞힌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미쳤다’는 얘기 들으며

한국 경제는 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홍역을 치렀다. 20일 새 석유값이 4배나 뛰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우리가 살길이 뭐냐”고 물었다. 김 회장도 답답한 나머지 “기업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박 대통령은 “사회적 충격이 적은 방안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전경련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중동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14년간 전경련 회장 국제담당보좌관을 지낸 박정웅씨의 설명이다.
“중동 건설 참여에 필수 요소인 정보·기술·자본·인맥 등이 전혀 없었다. 현대건설·삼환기업·한양건설 등은 맨발로 뛰었다. 이들은 일본 업체의 견제까지 받으면서 끝내 ‘중동 건설 붐’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세계에서 ‘미친 짓’이란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중동 달러를 쓸어담아와 국가부도를 막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때 이미 외환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세계 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선업 진출도 ‘미친 짓’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컸다.

현대그룹 출신 인사의 말이다.
“당시 모 경제부총리는 ‘현대가 망하는 건 괜찮은데 나라가 망한다’며 정 회장에게 호통쳤다. 위험 부담이 엄청난 조선업을 성공시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는 악담도 했다. 정 회장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한국 경제의 동맥 역할을 했고, 조선업은 세계적인 한국 대표선수로 컸다.”

‘종속 경제’ 될 뻔한 적도

“현대건설에서 번 돈을 다 버린다 해도 자동차를 하겠다.”
정주영 회장과 동생인 정세영 회장은 미국 포드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포드는 한국을 중국과 동남아의 전초기지로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자동차 조립국가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가 선진국 자본에 영원히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김효성 대한상공회의소 고문의 말이다.
“ 60, 70년대는 수입 대체산업 육성이냐, 수출 주도산업 육성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수출 주도산업 육성책을 선택했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립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자동차·조선 등이 선진국 자본에 종속되지 않았던 이면에는 ‘철강의 자립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한국에는 철강공장을 지어야 쓸모가 없다”며 약속했던 차관을 거부하자, 박태준 회장(현 고문)은 대일 청구자금을 동원해 황무지 포항에 제철소를 지었다. 현재는 세계 최강의 철강회사로 자랐다. 한국 경제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LG·SK그룹 등은 가전·화학·통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일궜다. 모두 맨손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군을 키웠다. 하지만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외환위기 당시 해외 전문가들은 한국을‘바로우 바로우(꾸고 또 꾸는)’ 경제라고 꼬집었다. 한국 기업들은 빚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지적이었다. 기업 부채비율이 대개 400%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다 보니 외환위기 전후 일 년간 화의·법정관리·파산신청한 기업이 1000여 개에 달했을 정도로 혹독한 시련도 겪었다. 세계로 비상하던 대우와 한보철강·기아차·진로 등은 부도로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김시래 기자

디지털과 바이오 방향은 잡았지만…

▶ 삼성과 LG 등은 차세대 IT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지상파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수신이 가능한 휴대전화(사진)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대그룹 계열사인 A건설업체는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사업 다각화로 신사업 투자를 오래전부터 기획하고 있지만 선뜻 투자를 할 수 없어서다. 이 회사 관계자는 “디지털과 바이오 산업으로 다각화 방향은 잡았지만 기술 패러다임이 워낙 생소해 머뭇거리고 있다”며 “투자 회임 기간이 길어 불확실성까지 커 고민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주요 기업들은 이처럼 “미래에 우리가 먹고살 업종은 디지털 산업”이라며 방향을 틀고 있다.

참여정부도 지원에 나섰다. 2만 달러 경제로 재도약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3년 ‘10대 성장동력산업’을 선정하기도 했다. 차세대 반도체·디지털 TV·디스플레이·디지털 콘텐트·지능형 홈네트워크·차세대 이동통신 등 대부분 디지털산업이다. 현재 정보기술(IT)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6% (2004년 기준)를 차지할 정도로 급부상했다. 특히 D램 반도체는 세계시장의 42%,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는 30%, 휴대전화는 25%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자원부의 문병철 사무관은 “이들 분야는 향후 10년을 먹여 살릴 산업”이라며 “이제는 우리 역량이 충분해 또 한번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현재의 제품은 조만간 경쟁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며 ‘제 2의 반도체’ ‘제 2의 LCD’등 차세대 전략품목 개발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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