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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④경제] 37. 누적된 위기의 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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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14일 청와대 집무실.

“이제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IMF와 협의를 추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강경식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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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소. 그대로 추진하시오.”(김영삼 대통령·YS)

“문민정부의 경제가 구제금융으로 마감됐다는, 자존심 상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강 부총리)

IMF 구제금융 신청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시 YS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외환위기에 직면했던 정부의 ‘IMF행’은 이렇게 결정됐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IMF 구제금융 요청은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난 21일에야 이뤄졌다. 그 사이 IMF에 자금 지원 요청을 해놓은 강 부총리는 경질됐고, 임창열 후임 부총리가 IMF행 발표를 미루면서 외환보유액은 급속도로 고갈됐다. 나라의 곳간이 비어 IMF 지원 요청을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자금 지원을 받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 ‘6·25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의 고통을 당하기까지 수많은 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우리 내부에서 생겼고 우리 스스로 키웠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 1년 전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계기가 됐다. 원화 가치가 너무 높게 유지되면서(달러당 840원대) 과소비가 춤을 췄고, 96년 경상수지 적자는 95년의 2.7배 수준인 237억 달러로 치솟았다. 누적된 적자는 금고를 비우는 신호탄이었다.

97년은 ‘부도의 해’였다. 1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진로·기아·해태·뉴코아·한라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개발 시대 풍미했던 과다한 차입과 방만한 경영의 종착점이었다.

대기업이 무너지는 것보다 실로 더 무서웠던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리더십 부재(不在)였다.

부실을 도려내는 게 우리 경제의 살 길이었지만, YS는 오히려 ‘부도 금지’를 지시해 부실 기업 정리를 가로막았다. 기아는 부실 경영의 장본인인 김선홍 회장의 퇴진조차 거부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구했다. 여야 정치권도 기아를 거들어 7월 중순 이후 100일을 사실상 부도 상태로 버텼다. 부실 기업에 쩔쩔매는 한국 정부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남아발 외환 위기까지 가세했다. 불안해진 외국인들이 차츰 돈을 빼기 시작했다. 기업은 물론 종금사와 은행의 해외 차입 길도 막혔다.

정부는 불안해 하는 국제금융계에 강력한 금융 개혁 입법을 약속하며 신뢰를 호소했다. 감독 체계를 개편하고 부실한 금융 산업을 과감하게 구조조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개혁 입법을 끝내 외면했다. 감독 체계 개편이 한국은행과 감독기관 노조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서였다. 금융 개혁 입법도 무산됐다.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금융 위기는 삽시간에 외환위기로 번져갔다.

97년 11월 21일, 정부의 IMF행 발표는 위기의 불씨를 잡지 못했다. IMF와의 협상은 매끄럽지 못했고,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재협상’발언에 국제금융계는 싸늘히 돌아섰다. 외국 자금은 한국을 탈출했다. 12월 3일 IMF와 550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합의했지만, 국제금융계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선 별 소용이 없었다. 외환위기는 국가 부도 위기로 치달았다.

“이게 맞는 숫자입니까?”

97년 12월 22일 오전 7시15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경기도 일산 자택 서재에서 김기환 경제협력특별대사와 마주 앉았다. 김 대사가 보여준 한국은행의 연말 외환보유액 예상 수치 ‘마이너스 6억 달러 ∼ 플러스 9억 달러’에 DJ는 크게 놀랐다. DJ가 그 뒤 밝힌 것처럼 금고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국가 부도를 맞을 판이었다. 김 대사는 DJ에게 새 정부가 ‘IMF 플러스’의 개혁을 하면 미국이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IMF 플러스’란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 IMF 프로그램에는 없는, 그 이상의 개혁을 의미했다.

DJ는 이날 미국 정부의 특사인 데이비드 립튼 재무부 차관을 만나 ‘면접시험’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DJ는 YS 정부와 IMF가 맺은 협약은 물론 ‘IMF 플러스’의 개혁까지 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새 정부의 개혁 의지를 확인한 미국은 이틀 뒤인 12월 24일 자정 무렵 선진 13개국과 함께 100억 달러 조기 지원 방침을 발표했다. 서방 금융기관들의 만기 연장도 이 무렵 다시금 재개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이렇게 국가 부도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외환 위기는 비로소 시작이었다.

IMF 프로그램은 본래 우리 경제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고금리+재정 긴축+ 구조조정’을 한꺼번에 추진하는 IMF 처방은 가혹했다. 환율을 잡기 위해 작동시킨 고금리는 수많은 기업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금융권 구조조정은 신용 경색을 불러왔다. 은행과 종금사 등은 자기자본비율을 국제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회수했다. 기업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고, 연쇄 부도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실업 사태를 초래했다. 대선 직전 60만 명 수준이었던 실업자는 두 달 만에 120만 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정리해고제와 적대적 인수합병 등 ‘IMF 플러스 개혁’ 은 근로자와 기업의 보호막을 거둬버렸다.

98년 우리 경제는 마이너스 6.7% 성장이라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냈다.

99년 8월 15일 DJ는 외환 위기를 이겨냈다고 선언했다. 그의 공약대로 취임 이후 ‘1년반’만이었다. 대우그룹 문제 등 부실은 산재했고, 구조조정은 진행형이었지만 어쨌든 환율(1207원)·콜금리(4.67%)·외환보유액(647억 달러) 등 몇몇 지표는 정상 궤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1년 8월 23일, 정부는 IMF로부터 빌린 195억 달러를 모두 갚았다.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긴 조기 상환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 정리를 위해 166조5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기업 빚은 줄어들었지만 국민이 부담해야 할 정부 부채는 크게 늘었다. 도산과 대량 해고로 중산층이 무너졌고, 빈부 격차는 확대됐다.

외환위기는 우리 경제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사라졌다. 살아남은 기업들과 금융기관의 재무구조는 확 좋아졌다. 외국인에 의한 인수합병도 일상화됐다. 정리해고가 도입되면서 ‘평생 직장’의 믿음은 깨졌고, 고용은 불안해졌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는 한국을 ‘개혁 시대’로 이끌었다. 정부는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개혁 시간표를 짜고 전쟁 치르듯 개혁을 밀어붙였다. 금고를 채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던 ‘주어진’, ‘강요된’ 개혁이었다. 그 결과 우리 정부 스스로 오랫동안 해내지 못했던 개혁 상당수가 IMF 관리체제 기간에 이뤄졌다. 이 때문에 IMF 구제금융 신청과 외환위기를 ‘불행을 가장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강경식 전 부총리는 달리 본다.

“외환위기가 축복이 되기 위해선 국민들이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았어야 했다”고.

이상렬 기자

‘운7 기3’으로 넘긴 한국호의 위기들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그해 12월 원유값은 배럴당 3달러에서 11.7달러로,4배 가까이 급등했다. 이른바 1차 오일쇼크였다. 합판과 가발을 팔고 일부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 조금씩 외환보유액을 모아가던 정부 곳간은 순식간에 바닥나기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 당시 외환보유액은 1000만 달러 전후로 떨어졌다.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다.”

당시 재무부(지금 재정경제부)차관보였던 정인용씨의 회고다. 그래서 그는 가방 하나 들고 외국에 나가 매일 이 은행 저 은행을 구걸하다시피 찾아다니면서 간신히 국가 부도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 부도를 면하도록 만든 1등 공신은 그 직전인 72년 시행된 ‘8·3조치’가 아니었을까. (조치 내용은 이 섹션 7면 참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의 회고.

“이 무렵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용완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8·3조치 덕택에 오일쇼크를 무난히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호(號)’의 위기는 외환 위기 이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운(運)7, 기(技)3’으로 극복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했던 60년대 후반엔 베트남전 특수로 위기를 넘겼다. 74년의 1차 오일쇼크 때는 중동 건설 특수로 극복했다. 70년대 말 덮친 제2차 오일 쇼크를 넘는 데는 중화학공업투자 조정 등 강력한 안정화 시책이 주효했다.

위기는 대개 나라 밖에서 펼쳐진 ‘특수’와 나라 안의 ‘특혜 조치’로 넘어갔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 노력은 소홀했다. 기업들은 빚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8·3조치는 위기 극복의 수훈갑이었으나, 대마불사의 신화를 남겼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는 베트남전 특수나 중동 특수가 없었다. 8·3조치 같은 특혜 조치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오직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가며 국제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으나, 우린 그 길을 가지 못했고, 결국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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