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냐 범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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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자 유도 81㎏급에는 두 개의 태양이 빛나고 있다. 김재범(29·한국마사회)이 1인자의 지위를 굳혀가던 중에 지난해 말 73㎏급의 간판 왕기춘(26·양주시청)이 체급을 올려 라이벌 구도를 이룬 것이다. 두 거인은 지난 1년간 한 번도 맞대결 한 적이 없다. 팽팽한 기싸움만 계속하던 매트 위의 두 거인이 드디어 자웅을 겨룬다. 27일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개막하는 제주 그랑프리 국제유도선수권이 무대다. 두 사람은 28일 남자 81㎏급에서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김재범은 자타공인 세계 최강자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 제패)을 달성한 뒤에도 변함 없이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9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하며 2관왕에 올랐고, 지난달 제주 전국체전에서도 시상대 맨 위에 섰다. 런던 올림픽 당시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전 세계 유도선수 중 1%가 되겠다”던 그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그 1% 가운데 1%가 되고 싶다”고 목표를 높였다.

 김재범의 강점은 뛰어난 체력과 악바리 승부 근성이다. 주무기라 부를 만한 기술 없이도 최강자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비결이다. 정규 경기 시간인 5분 동안 쉴 새 없이 상대를 파고든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미스터 파이브 미닛’이다. 마디마디 부러진 채 굳어 S자 모양으로 휘어진 손가락이 트레이드 마크다.

 그런 김재범에게도 왕기춘은 껄끄러운 존재다. 한 체급 아래인 73㎏급에서 함께 경쟁하던 7년 전의 기억 때문이다. 2007년 파리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선 김재범은 신예 왕기춘에게 패해 탈락했고, 그해 겨울 81㎏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김재범이 노력형이라면 왕기춘은 천재형에 가깝다. 주특기인 양깃업어치기는 완성도와 성공률 모두 당대 최고다. 상대 도복 깃을 잡고 미는 척하다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시도하는 이 기술로 2007년 김재범을 무너뜨렸다. 업어치기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무게중심을 뒤로 뺀 선수에게 시도하는 안뒤축걸기는 ‘역발상의 필살기’다.

 지난해 뒤늦게 81㎏급으로 옮긴 왕기춘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한동안 새 체급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지난 5일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정상에 올라 김재범과 경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량을 입증했다.

 제주 그랑프리는 두 강자가 81㎏급에서 처음 맞붙는 무대다. 7년 만의 리턴 매치이기도 하다. 앞서 전국체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왕기춘이 8강전 도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맞대결이 불발됐다. 왕기춘이 우승한 대표선발전에는 김재범이 불참했다.

 두 선수는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훈련에 몰두하고 있다. 김재범은 “기춘이와 승부를 가릴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외국 선수들 중에도 강자들이 많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해 달라”고 했다. 왕기춘은 “재범이 형과는 워낙 서로를 잘 아는 만큼 큰 기술이 통할 확률은 높지 않다. 치열한 유효 싸움 속에 적절한 변칙 기술을 섞어 승부를 내겠다”고 말했다.

 제주 그랑프리 국제유도선수권은 세계 53개국 5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해 총 10만달러(1억1100만원)의 상금과 올림픽 출전 랭킹포인트(우승자에게 300점)를 놓고 경쟁하는 메이저급 대회다. 우리나라는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와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상위입상자를 합쳐 56명(남녀 각 28명)이 출전해 2연속 종합우승을 노린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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