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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10》제78화 YWCA 60년 (6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8년 창립45주년이 지난 다음해 9월10일. 한국YWCA연합회 회관 봉헌예배가 거행되었다. 이날 세계YWCA 부회장「델·카르멘」여사가 참석하여 개관테이프를 끊었고 내빈대표로 축사를 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회원 전부는 아니지만 각지방Y를 대표하는 회장들과 모금에 성의를 보인 유지들. 그리고 외국공관이나 기관의 대표들, 모는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감사의 예배를 올렸다.
새집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일을 시작한 연합Y 식구들은 「고생끝에 락」이라는 속담을 마음 깊이 새기며 즐겁게 집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l년쯤 지나 3, 4층 전부를 임대해 사용하는 포항제철이 공간이 좀더 필요하다고 해서 2층까지 양보하고 l층으로 사무실을 옮긴 것이 다시 올라가지 못하고 14년이 지난 오늘까지1층만으로 꾸려가고 있다.
건축후에도 박「에스터」씨는 계속 바빴다. 봉헌예배가 끝나자 다음날부터 회관에 들여놓을 세간을 사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구입한 세간들을 배치하기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계속일했다. 1층 부엌에 쟁반과 냉장고도 새로 사들이면서 직원들에게 『내가 은퇴해서 가고 없으면 언제 누가 이런 것을 장만할 수 있겠니. 좀 무리는 가지만 필요한 것은 지금 마련하는 게 좋아』하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모금이 어려웠지만 이렇게 아담한 회관이 순전히 성의가 모여서 이루어졌다는 그 사실이 감격스러웠고 종일을 뛰어다녀도 지칠 것같지 않은 어린애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세간을 새로 들여놓는 일을 낮에 하고 밤에도 쉬지않고 이 건물이 되어지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편지도 손수 썼다.
이같은 격무 때문에 그 해 10월2l일 계단에서 현기증으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성모병원 입원실에 자신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고 오라버니와 친지들이 둘러선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며칠만에 깨어난 그를 본 사람들은 『이젠 됐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확실히 하느님께서는 그의 그 재능을 좀더 이 기관을 위해 쓰도록 그를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내신 것이라고 믿었고 이에 감사했다.
내출혈로 눈이 충혈되었을뿐 그는 한달만에 완쾌되어 퇴원했다.
퇴원한 것이 크리스머스 준비를 해야 하는 때라서 그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크리스머스 카드를 쓰기에 또 바빠졌다. 그는 편지를 이렇게 써내려갔다.
『모든 계획이 다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번 연말에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여러분에게 한국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많은 것을 알려드릴 계획이었읍니다. 이나라의 발전상, YWCA사업등.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부득이 수정을 해야할것 같습니다. 10월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받은 상처가 완쾌되지 않았는지 아직 현기증 때문에 먼 여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기증만 없어지면 될수 있는대로 빨리 뉴욕에 돌아가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생명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대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데는 반드시 어떤 뜻이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이 끝에서 한 말은,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는 그런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희생적인 정신과 노력의 결과로 어느 남자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고 10년안에 두개의 큰 건물을 명동 한복판에 우뚝 서게하는 기적을 낳았다.
그의 그 철저한 봉사정신을 곁에서 몇십년을 보면서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들을 볼때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 건물들은 지나간 14년, 또 24년동안 수많은 Y회원 또는 일반시민들이 수없이 드나들면서 Y정신을 배우고 박「에스터」씨와 그 외 많은 선각자들이 뿌린 씨의 열매를 마음껏 맛볼수 있는 곳이 되고 있다.
연합회 회관이 준공되고 4개월후 한국YWCA는 이 회관을 「에스터 기념관」으로 명명, 이로써 그에 대한감사의 뜻을 표하게 되었다.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온 것이다. 사랑, 생명, 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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