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작<시간의 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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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작가 이청준의 최근 작품들을 함께 모아 엮은 소설집 「시간의 문」 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작가가 탐색해 온 소설적 과정의 가장 내밀한 구석까지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소설의 세계에서 일찍부터 스토리의 재미를 거부한 이 작가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 나섰던 70년대 후반의 소설들은 언어의 진실이라는 기본적인 명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들이다.
언어의 문제가 야기하는 의미의 포괄성과 그 다양한 면모를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는 물론 작가의 지적 상상력의 세련이 그 뒷받침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의 몇몇 작품들은 지나치게 관념에 머물러 있다든지 추상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번의 작품집 「시간의 문」에 수록된 소설들은 언어의 문제에 집착해 있던 70년대 말의 소설들과는 그 소재의 영역이 유사하다.
하지만 작가 이청준에게 있어서 언어는 형상의 문제였고, 이제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그는<시간>과 싸우고 있다.
예술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만하는 가치의 승화는 일상의 현실을 넘어서는 형이상의 시간속에서 가능해진다.
이청준의 소설이 독자들의 감응력에 폭넓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개체 가운데에서 발견하는 보편적인 인간 때문이다.
사소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규정해 주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파헤쳐 놓고 있다. 그는 이제 예술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진실한 의미를 찾아 다시 그의 「시간의 문」을 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집 「시간의 문」 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책은 이야기이기 이전에 소설의 형식을 빌어쓴 작가 이청준의 예술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같다. 이 작가가 언어와 시간의 문제를 뚫고 나아가는 고뇌의 자취가 작품집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그가 형상의 언어와 존재의 시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수 있을 때에<보편적인 자기>로 돌아가고자하는 그의 소설적 욕망이 관념과 추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중원사간·2백79페이지·2천5백원>
권영민(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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