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들어 공업화 진행 따라 근로여성 급증|실태조사 등사위한 준비작업에 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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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0년대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도시화, 공업화로 인한 여성들의 취업의 증가와 더불어 도시로, 공장으로 몰려드는 농촌의 젊은 여성들의 문제는 나날이 커가고 있었다.
이에 65년 3윌 한국 Y연합회에서는 심포지엄을 열고 『저소득 직장여성들의 실태』에 관해 자료를 모으고 앞으로 이에 대한 프로그램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인천 부두 노동자 가족을 상대로 일해온 김치복 목사는 저임금 근로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호소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호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수많은 어린 여성들이 이 나라 산업을 위해 일하지만 그들이 받는 대우는 형편없이 낮다는 것이 심포지엄에서 밝혀졌다.
또 그들은 그들의 권익을 전혀 옹호받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그들이 어떠한 억울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 권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윤락의 길에 빠지기 쉬워 이것도 하나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 근로자들은 방직·제약·이용·미용·버스안내양·목재회사 근무 등인데 그 수에 있어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실태를 파악했지만 너무나 대상이 많고 그 직종이 다양하기 때문에 Y로서는 어떻게 손을 대야할 것인지 막연했다.
그렇다고 이미 이러한일에 파고 들어간 도시산업선교회와 손을 잡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힘이 미칠 수 있는 한도에서 해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들의 생활을 개선해줄 만한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줄 수는 없었다.
서울 Y에서 66년 서울여객·동영직물·대동모방 등의 책임자들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갖는다든가, 지극히 소극적인 그들의 정서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해줄 것을 요구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그 엄청난 문제들을 한 매듭도 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실정이었다.
2, 3년 동안 부쩍 늘어난 수출붐과 더불어 여자들의 노동력이 수도 없이 필요했지만 돈벌이를 늘리는 것만이 주요목표인 사업가들과 정부는 전혀 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싸게 임금을 주고 싼 물건을 만들어 내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때이니까 우리들의 가냘픈 손이나 소리가 결국 낭비에 그치고 만다면 이는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근로여성들을 위한 어떠한 형태로든지 프로그램을 해야겠다는 섕각에서 75년 9월 연합회 주최로 여성근로자들올 초청하여 좌담회를 가졌다. 그들 자신들의 현재의 처지를 직접 이야기로 들음으로써 다만 우리들의 이에 대한 의식이 좀 달라졌을 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겠다. 그들의 술회를 여기 적어 공개함으로써 그들을 다소나마 이해해볼까 한다.
『저는 지금 일하는 곳에 들어온지 4년입니다. 4년동안 4급, 3급을 거쳐 2급입니다. 현재 월급은 1만원 정도입니다. 또 한급 올라가려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대개가 16세쯤 해서 들어와서 결혼하기 전까지 다니게 되니까 근무경력은 대개 5, 6년이라고 할 수 있죠. 또 7∼8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모두 일을 지겹게 생각하고 있지요.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지겨울 수 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해친다고 했다. 대개의 작업장이 공기가 좋지 못하니까 그렇고 식사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고칠 수 있는 채널이 거의 없다.
노동조합이 있지만 그들 간부는 오히려 업자측에서 업자를 옹호한다니까 말이다. 발언을 좀 한다고 점 찍힌 사람은 참석을 훼방한다고 했다.
이들 저소득 근로자들이 바라는 바는 다음의 발언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A = 『저희가 바라는 것은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경영자가 생산품에 대한 이익을 공개하고 남녀차별 없이 대해주고, 요구사항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가정적인 분위기가 될거라고 생각해요』
B = 『그 무엇보다도 저는 저희들을 인간대 인간으로 대해 줬으면 해요. 기계앞에 있다고 해서 기계의 하나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숨쉬고 느낄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요』
이러한 요구로 보아 그때 그들에 대한 대우를. 짐작할 수 있었다.
70년대에 접어들어 저임금근로여성 문제가 심각했지만 Y는 이들의 정서교육 정도에 그치고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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