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남긴 새생명 하늘에서도 지켜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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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태어난 수전 토러스의 딸 수전 앤 캐서린.

▶ 수전 토러스(中)의 행복했던 시절. 왼쪽이 남편 제이슨, 안고 있는 아기가 두 살배기 아들 피터.

몸무게 0.82kg, 키 34㎝.

가냘픈 어린 생명이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 엄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뇌사 상태에서 딸을 낳은 뒤 하루 만에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 3일 숨진 암(癌)환자 수전 토러스(26)의 사연이 전 세계를 울리고 있다.

임신 27주 만에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딸 수전 앤 캐서린은 출생 직후 신생아 집중 관찰실로 옮겨졌다. 아기가 태어난 버지니아주 알링턴 병원은 "아기의 움직임이 매우 활기차다"고 밝혔다. 엄마의 암이 전이되지만 않았다면 앞으로 생존할 확률은 90% 안팎으로 기대된다.

국립보건원(NHI)에서 백신 연구원으로 일하며 남편 제이슨(26), 아들 피터(2)와 행복하게 살던 수전에게 불행이 닥친 건 5월이었다. 임신 15주째였던 수전은 어느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한 달 전부터 두통.구토 증세를 호소했지만 병원에서는 입덧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고교 때 발병됐다가 치료된 줄 알았던 흑색종(피부암의 일종)이었다. 흑색종은 9년 가까이 잠복해 있다가 뇌로 전이됐고, 폐.간으로 번졌다. 뇌종양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병원 측은 남편 제이슨에게 "이미 의학적으로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최후 통보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미술품 세일즈맨이었던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석 달째 새우잠을 자며 식물인간 아내 곁을 지켜왔다. 남편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신은 선택을 강요했다. 생명 유지 장치를 달아 아내의 생명을 연장한다면 아이를 살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아이가 암세포로부터 자유롭다는 보장은 없다. 뇌사 상태의 아내 몸이 아이를 충분히 자라게 할 정도로 버텨줄지도 의문이다. 생명 유지 장치를 택한다면 하루 7500달러(약 750만원)에 육박하는 병원비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수밖에 없다. 아내라면 어떻게 했을까.

제이슨은 아들 피터를 임신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의사는 기형아 검사 직후 "아이가 다운 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수전은 인공유산을 거부했다. 다행히 피터는 이상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아내의 의지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몸이 어떻게 돼도 아이를 낳겠다'는 것일 터였다.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24주까지만 버텨준다면 희망은 있었다. 27주째를 넘긴 지난달 말 의료진은 "더 이상 태아를 놔두면 모체의 암세포가 전이된다. 미숙아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1일 밤 제이슨은 아이를 뱃속에서 꺼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는 동안 병원비는 100만 달러(약 10억원)를 훌쩍 넘었다. 가족들은 오랜 숙의 끝에 수전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래리 킹 라이브쇼 등을 통해 뇌사 엄마와 어린 생명의 눈물겨운 투쟁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성원이 쏟아졌다. 성금만 40만 달러(약 4억원)가 모였다. 임신 26주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자신의 아기 사진을 보낸 여성도 있었다. 일각에선 "여성의 몸이 아이 낳는 도구냐" "아내의 생명을 억지로 유지시켜 아이를 낳게 했다"는 비난도 있다. 그럼에도 "사선(死線)을 넘은 모정"이라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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