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가쟁명:유주열] ‘APEC 블루’ 와 기러기(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1월10-11일간 베이징 도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엔치후(雁栖湖 기러기가 서식하는 호수) 국제회의센타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대한 관심이 높다.

중국은 APEC회의 기간 중에 공장이 쉬고 난방을 못하고 자동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어려움을 감수하고 전통적인 중국식 ‘디쭈즈이’(地主之誼 손님에 대한 주인의 예의)를 다하여 대기오염으로 악명 높은 베이징을 ‘APEC 블루’라는 푸른 하늘을 보여 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번 APEC 정상회담의 성공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의 깃발을 다시 한 번 높이 올리는 시 주석 외교의 승리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시 주석은 개최장소인 엔치후의 이름을 따서 APEC 21개 회원국은 21마리의 기러기(雁)처럼 무리지어 같이 날자고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제창 오바마 대통령을 위시하여 APEC 정상들의 지지를 받아 낸 것이다.

중국의 외교를 크게 보면 마오쩌둥(毛澤東)시대에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외교였다. 쑨원(孫文)의 미망인으로 미국 웰즐리 대학 출신의 쑹칭링(宋慶齡)여사가 신 중국의 부주석으로 세계를 순회하면서 중국을 국제사회에 알렸던 것도 이때이다. 덩샤오핑(鄧小平)시대에는 경제성장을 최우선하여 안정된 국제환경의 구축을 중시하였다. 능력을 감추고 시간을 번다는 의미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주요 전략이었다. 시진핑 시대에는 중미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규정짓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G2 경제의 중국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 달라는 외교로 보인다. 신형대국관계는 시 주석이 제창한 새로운 양국관계 개념으로 1) 대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으며 2) 상호 존중하고 3) 협력과 솽잉(雙? win-win)의 세 개의 원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시사 주간지는 시 주석의 카리카추어 얼굴을 표지에 싣고 시 주석을 ‘시(習 Xi)황제’로 부르면서 지금까지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생각된 시 주석이 이번 기회로 국내외에 자신의 우뚝 선 모습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 주석을 최고의 지도자(supreme leader)였던 마오쩌둥 및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두면서 중국을 세계질서의 맨 위쪽의 최강대국(super power)으로 올려놓고자 하는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시 주석이 짧은 기간에 제일인자(the power of one)가 된 기초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많은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시 주석의 젊은 시절 두 사람의 인물 즉 아버지 시중쉰(1913-2002)과 첫 직장상사 껑뱌오(1909-2000)와의 만남이 오늘의 시 주석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002년 5월22일 중국의 8대 혁명 원로의 한사람인 시중쉰(習仲勳)이 89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다행히 자신이 낳은 자녀 중 가장 총애했던 시진핑이 임종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저장성(浙江省) 부 서기였던 시진핑은 마침 베이징에 출장 중이었다.

시중쉰은 국무원 부총리 재임시절인 1962년 반당분자로 해임되어 1978년 복권될 때까지 16년간 구류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15세 때 공산당에 입당 류즈단(劉志丹)을 따라 농민운동과 항일 게릴라전을 펼쳤다. 1935년 10월 마오쩌둥이 9600km의 대장정(大長征)을 거쳐 연안에 도착할 때 쉬중쉰은 이미 류즈단과 함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1962년 류즈단의 활동이 소설로 만들어 지고 부총리였던 시중쉰이 이에 서문을 쓴 것이 마오쩌둥을 분노케 하여 반당분자로 체포된 것이다. 소설에는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쿠데타 미수로 자살한 가오깡(高崗)을 영웅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중쉰은 어려운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지방으로 하방(下放)된 시진핑에게 근검절약과 인화를 중시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라는 교육을 잊지 않았다. 시진핑이 중국의 여러 집권세력인 공청단 상하이방 태자당 등과 골고루 인화를 다진 것은 아버지의 가정교육의 결과였다.

시진핑은 문화혁명 직후 칭화(淸華)대학에서 학습하고 1979년 졸업 처음 배치된 직장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사무국)이었다. 시진핑은 당시 국방부장이며 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장(사무총장)인 껑뱌오(耿飇)의 비서 일을 맡게 되었다. 껑뱌오는 군인이었지만 신 중국 건설 후 외교부에서 스웨덴 대사 파키스탄 대사 등을 역임하고 국무원 부총리가 된 사람이다.

껑뱌오는 자신의 3명의 비서 중에 가장 어리지만 성실(踏實)하고 학습에 집중(用心)하는 시진핑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시진핑 청년은 3년간 껑뱌오의 비서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각종 회의를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읽고 고위 인사들의 활동을 보고 배운 현장 지식이 장래 그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껑뱌오는 장래가 촉망 되는 시진핑을 유능하다고 비서로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 1982년 허베이성 정딩현(正定縣)의 부서기로 나가 지방행정을 경험하도록 권유한 사람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