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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 될 수 없는 일제학정의 미상-전 조선 총독부 고간 입장에서-팔목신웅<당시 특 고 책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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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1독립운동」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식호칭이 「3·1독립소요사건」혹은 「3·1만세사건」이 었읍니다. 그것을 지금의 교과서에「폭동」이라고 썼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해방전 19년간을 조선총독부에 재직하면서 소경찰부장, 총독부경무국경무과장, 보안과장, 석해·전남지사등 고관직을 두루 지낸 「야기·노부오」(팔목신웅·79)씨의 말이다.
「야기」씨는 현재 살아있는 총독부관료 중에는 최고령이고 최고의 요직을 거친 일제총독정치의 생생한 증인이다. 19년의 재직기간 중 15년을 경찰간부로 있었으며 그중 2년간은 당시 악명 높던 특고(특별고등경찰)의 책임자였다.
이력만을 본다면 그의 말대로 『한국인에게 가장 나쁜 일본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만약 내가 한국인이라면 나도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의 식민통치에 비관적이고 한국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선『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지금의 비극을 겪고있는 것이 일본의 책임』이라고 말하고『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것』이라고 했다.
2차대전 때 일본은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나누어 북쪽은 관간군, 남쪽은 조선주둔군에 수비책임을 맡겼는데 패전으로 얄타협정에 따라 관간군은 소련에, 조선주둔군은 미군에 항복하게 되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남북 분단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것도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노전쟁때「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약속하고 전쟁이 끝나자 외교권을 뺐었으니 한국인들이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는 애기다.
그는『총독정치의 기본이「일갈동인」(한국인과 일본인을 똑 같이 본다는 뜻) 이었다』고 밝히고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동화주의」로 해석되어「창씨개명」등 억압과 강제에 의한 동화정책이 실시되었다』고 했다.
『창씨개명은 스스로 일본이름을 갖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총독부의「참모」(국장)가 건의한 것이지요. 만주·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 중에는 일본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40년 2월11일부터 6개월간 기한부로 창씨개명을 공식으로 「인정키로 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강제·협박에 의탄 창씨개명이 됐읍니다.』도 지사·군수·면장에 이르기까지 자기 관할구역 안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 한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성을 갈도록 강요했다고 그는 말한다.
『전남의 어느 양반은 끝까지 버티다가 아들들이 다니는 소학교 교장이「개명을 안 하면 학교에 오지 말라」는 바람에 아이들의 이름을 고쳐주고 자신은 우물에 빠져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창씨개명한 한국인이 79%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강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될 수 있었겠느냐』 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미나미」(남차낭)총독이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많이 썼으며 창씨개명·조선어 교육금지가 모두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화 13년(1938년) 3월의 조선 교육령 개정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제도적으로 조선어교육이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그때까지 필수 과목이었던 것이 교장의 재령으로 선택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부실과목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어 과목을 제외하는 학교가 많았고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탄압정책이 이처럼 겉으로는 강제가 아닌 것처럼 위장돼있으나 실제 집행은 강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강제 징용도 그 중의 하나. 『본국에서는 징용령에 의해 노무자 몇 명을 보내라는 지시가 올뿐이지요. 징용을 하려면 본인에게 통보를 하는 등 절차를 밟도록 돼 있읍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머릿수를 맞추는데 만 급급해서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족에게 말 한마디 할 틈도 주지 않고 트럭으로 끌어온 일이 비일비재 했읍니다.』
그는 일본의 교과서 검정관들이『이 같은「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당시의 문서에 희롱되고 있는 것 같다』며 진실을 직시할 것을 촉구했다.
『신사참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독부는 한일합방 후 서울에 조선곤궁, 각 도청소재지에 신사를 만들었는데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국민정곤 총동부조선연맹」을 조직, 총독이 직접 책임자가 되어 신사참배를 독려했읍니다.』신사참배는 교회목사에게도 강요되었다고 그는 시인한다.
『내가 총독부 보안과장으로 있을 때인데 감리교의 한 목사가 곤도행사의 하나인「미소기」(물로 몸믈 씻는 것)를 한다고 해서 직접 따라 가본 일이 있읍니다.』
그는 자신의 19년 총독부 생활중이 일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에 보답을 하기는 커녕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한일합병, 식민통치 등 해만 끼쳤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일본인들은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요구가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이를 감내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중국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잠시 침략을 받았을 뿐이지만 한국인들은 주권을 빼앗기는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교과서 문제도 일본은『한국문제에 관한 한 중국보다 더 철저한 연구와 겸허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76년 백범의 탄신 1백주년 기념식에서 그가 인삿말을 하도록 초대됐던 것(실재로는 참석은 못하고 녹음으로 인사)도 그의 인간 됨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동경의 한국연구원을 찾았던 그가 총독정치의 비리를 증언하겠다고 선뜻 응한 것도 평소 그의 생각과 자세를 엿 볼 수 있게 했다.
그는 45년 이후는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해야 한다는 뜻에서 한국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했다.
윤봉길·이봉창의사의 유해를 환국 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했으며 지금은 한국유학생을 위한 일한문화협회 한국교육재단 등의 회장·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의만으로 일제의 악정이 덮어질 수 없으며 또 그가 총독부 관리를 했다는 허물이 벗겨질 수도 없다고 쓸쓸히 웃으며 말한다. <끝><동경=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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