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진정한 다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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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젊은 국회의원의 옷차림을 놓고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반대하는 쪽은 국회 전통이나 보편적 예절에 비추어 너무했다는 의견이고 찬성 쪽에서는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신선했다고 보았다.

찬반의 초점은 전통과 다양성의 대립이었다. 당사자의 주장은 다양성 때문이었다. 그는 "서로 다름에 대한 존중과 관용, 이것이 국회에 첫발을 내딛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회발전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듣고 배운 보통사람으로서 이러한 주장에 반박할 논리가 궁색한 것도 사실이다. 기껏해야 전통이나 찾고 예의 범절이나 되뇌어서야 어딘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보수에 찌든 인물 같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 자유·평등 어느쪽을 중시하나

"면바지를 입고 넥타이 안 맸다고 국회에 못 나가느냐, 기성세대들은 보수 꼴통같이 논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를 깨야 한다"는 암묵의 메시지가 실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새 정부의 영화감독 출신 장관도 넥타이를 안 매고 기자회견장에 등단하고 스포츠용 차를 몰고 다니니 다양해졌다.

청와대 참모라는 사람들의 언행 역시 눈에 띄는 경우가 많으니 과거와 비교할 때 다양해졌다. 이들의 옷차림과 언행이 다양하듯 이들 속 사람도, 이들의 정신도 타인의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일까.

손쉽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교복 자율화를 했었다. 중.고생들이 다양한 옷을 입었다. 그렇다고 우리 교육이 다양화됐느냐. 아니다. 교육 평준화라는 조치로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보다 더 일률적인 교육체제로 변했다.

평준화와 평등이라는 단어는 다양성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누구나 똑같기 바라는데 다양성이 나올 수가 없다. 나보다 잘난 사람, 못한 사람이 다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성은 평등에서 나오지 않고 자유에서 나온다. 새 정부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 중에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념을 강조하게 되면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이념은 사회가 복잡하게 구성돼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이념이 요구하는 목표를 향해 사회를 재단하려 든다.

전교조가 문제인 것은 학생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반전이니, 반미니 하면서 한쪽 생각만을 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과거 획일성 반공교육을 고친다며 또 다른 획일성 교육을 하기 때문이다. 국회가 반대한 국정원 인사를 임명한 이유만 해도 그렇다.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한다는 겸손만 있었어도 이렇게 처리는 안 했을 것이다.

청와대는 국회의 요구를 '분열주의적 이념공세'라며 이념싸움으로 끌고 갔다. 이념이 무엇이든 여야가 반대를 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양성은 견해가 다르더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데서 생겨난다. 민주주의는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거 반공주의가 반공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듯이 요즈음은 새 정부의 노선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냉전논리, 수구보수로 몰아간다.

사회란 보수신문도, 진보신문도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왜 유독 보수신문만 비난하는 것일까. 이것이 다양성일까.

다양성은 점진성을 의미한다. 일거에, 단칼에 해치울 수 없게끔 사회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거에 부사장과 7명의 본부장을 갈아치운 KBS 인사를 놓고 새 정부 쪽 사람인 이사장까지 '혁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다양성과는 어떤 관계일까.

*** 국회 복장파동은 성공했지만

이렇게 보면 새 정부는 다양성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새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물들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우리는 군사독재의 획일성을 경험하면서 자유와 다양성에 목말라했다. 그래서 우리는 옷차림만 보고도 "저것이 바로 다양성이구나"하며 호감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 복장 해프닝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의 참모습이 과연 그럴까. 사상은 이념지상주의로 무장돼 있으면서 겉모습만 다양하게 포장돼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위장된 다양성이다.

다양성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성이라는 당의(糖衣)를 입혀 획일성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번 복장 파동의 논점은 다양성이냐, 전통이냐에 있지 않고 다양성의 진실성 여부에 있는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