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477)YWCA 60년(78)-Y 창립 30주년(3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YWCA는 피난중 창립30주년을 맞았다. 원래 4월에 했어야되었지만 4월에는 전국대회를 했고 8월에 박 「에스터」고문총무가 오게 되어 기념행사를 11월9일에 하게 되었다.
11월 제2주는 세계Y가 제정한 연례행사, 세계기도주간인 것이다. 창설할때 부터 한국YWCA는 이 주간을 지켜왔다.
이 기도주간의 첫날을 택해서 3Q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장소는 이화여대 가교사에 새로 지은 강당이었다. 이 강당은 옛날 시골교회을 연상케하는 흙바닥에 5∼6명이 앉을 수 있는 벤치를 1백여개 놓아 입학식· 졸업식을 할 수 있었던 피난민에게는 아주 훌륭한 강당이었다.
30추년행사의 순서는 보통 다른데서 볼 수 있는 예배와 공로자표창, 금활난박사의 Y30년의 회고담을 1부로 했고 ,2부는 아주 인상깊었던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 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날의 프로그램을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금정왕교수와 최원갈교수 (현재 선화여고 교장)가 이대학생Y을 동원하여 극적인 표현으로 한국Y 30년사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처음 세분 창설자의 희생적이고도 열의에찬 Y창절로부터 중요한 사건들을 극으로 엮은 것이었다. 운영비, 간사해외 훈련등을 위한 모금운동, 특히 자신들의 패물을 내놓은것등이 나라·여성들의 발전을 위해선 어떤 희생도 달게 받을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어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회장 최례순씨가 북괴군 보위부에 끌려가는 장면이었다.
그에게는 남매와 2주일전 분만한 갓난아기가 있었다. 그 애절한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최례순씨가 끌려간후 갓난아기는 죽고 남편은 피난내려와서 사냥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천애의 고아가 된 딸 효은은 최례순씨를 학생때부터 사랑했던 금신실선생이 길렀다. 그는 이대졸업후 결혼하여 금신실선생을 어머니 대신 모시는 모범 효녀로 영리한 아내, 좋은 어머니로 모범주부다.
아들 환성은 이모님 (박순양씨 어머니) 이 길러 연세대를 졸업했고 착실한 사업가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있다.
박 「에스터」씨는 세계Y를 통해 미국·호주·필리핀등 많은 나라로 부터 원조를 받아 우선 부산YWCA회관을 남포동에 마련했고 개관식을 같은날 갖게 되었다.
30평 정도의 2층 건물이었고 연합회와 서울YWCA도 이 건물에서 일을 했다.
세 기관이 쓴다 해도 다 같은 자매 기관이었으니 어쨌든 우리집이라는 것은 감사한 일일 수밖에.
다음은 서울에 있는 건물도 수리를 했고 전번 해외훈련을 받고 들어온 안인서씨를 임시총무로 임명하고 이동숙씨등 2명의 간사를 함께 서울로 보내게 되었다.
박「에스터」씨는 계속해서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이에 응답하는 구호품이 매일 도착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그 많은 구호품 보따리를 끄르면서 배운것이 많았다.
재해가 있을 때마다 신문에 많은 액수의 돈을 낸 명사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나는 항상 『얼마 만큼의 성의가 그 속에 들어있을까』하는 의문을 품는 때가 많다.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품을 보면 작은 물건이라도 그렇게 정성스럽게 포장을 하고 헌옷이라도 깨끗하게 세탁을 하고 일일이 다림질해서 보낸다. 그뿐 아니라 어떤 물건이 필요할까 하는 것을 심사숙고해서 같은 것을 대량으로 공동구입해 보낸다든지, 세밀한데까지 신경을 썼다는 흔적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즉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이때 서울에서 벌인 사업중 하나가 전쟁 미망인들을 자립할 수 있도록 양재 기술을 소정기간에 마치고 일을 맡아서 일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 보고를 받고 미국의 직업여성클럽 전국협의회는 재봉에 필요한 바늘·실·가위등 재료와 기구들을 수집해서 보내기도 했다.
또 CARE 같은 구호기관을 통해 털실세트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티키트를 발행하여 받아가게 했다.
구호품은 집과 옷, 세간을 다버리고 나온 피난민들에게 절대 필요했었다. 그 누구도 구호품의 신세를 지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